[Opinion] 일상이라는 연극과 그 관람 [문화 전반]

- 어빙 고프먼과 폴 리쾨르를 중심으로
글 입력 2017.11.1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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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시작하기 전 이 글이 다른 글들에 비해 딱딱하고 어렵게 쓰여진 점 양해를 구하고 시작하고자 한다.


 가면, 연기. 일상을 설명하는 말로 흔히 볼 수 있는 단어들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적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사회생활의 중요한 덕목으로 이야기된다. 일상에서도 인간관계를 위해서 때로는 내 감정을 감추기도 하고 다른 나를 연기하기도 한다. 즉 우리는 한명 한명이 연기자인 것이다. 각자의 연기 실력의 편차를 우리는 처세를 잘한다거나, 때로는 약았다고 하는 등 수많은 방법으로 표현한다. 이것들을 혼합해 봤을 때 일상을 연극이라고 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고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어빙 고프먼 - 일상을 연극으로 바라본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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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빙 고프먼(1922~1982)은 일상이 연기라는 생각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학자이다. 그는 미국에서 교수 활동을 한 캐나다 출신 사회학자로 사회에 연극 모형을 적용해 미시사회학에서 공헌을 했다. 그는 먼저 무대를 정의한다.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 앞은 우리가 사회활동을 해나가는 장이며 소품들은 내가 실제로 사회활동에서 접하는 무엇들이다. 고프먼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식당 웨이터의 예시를 사용한다. 식당은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 앞이고, 웨이터는 내가 연기해야 할 배역이다. 웨이터는 병따개나 메뉴판 등의 무대 소품으로 자신이 숙련된 웨이터임을 고객에게 연기할 것이다. 이처럼 고프먼은 일상을 연극으로 구조화한다.

 그렇다면 연극에서 연기를 하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 고프먼의 자아는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여기서의 분류와 용어는 ‘고프먼 관점에 따른 자아의 유형화와 커뮤니케이션적 함의 -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의 환경에서 자아의 적용’ 논문의 저자인 장현미 선생님의 것을 인용하고자 한다) 첫 번째 영역은 ‘자아 추구적 자아’이다. 자아 추구적 자아는 무대에 나타나지 않는 자아로 밖으로 보이는 나를 연출하는 자아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남에게 잘 드러내지 않는 무가공의 진짜 내면이 자아 추구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영역은 밖으로 드러나는 연기의 결과물들인 ‘인성 관리적 자아’이다. 이 자아는 또다시 ‘상호작용 의례적 자아’와 ‘자기관리적 자아’로 나눠진다. 상호작용 의례적 자아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는 관계적 자아이며 자기관리적 자아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자기 PR의 자아이다. 전자는 그 사회에 알맞게 도덕적인 자신의 모습을 연기하며, 후자는 자신의 우수성을 연기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자아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자아의 범위에 들어간다는 것은 연기라는 과정을 거친 가공의 결과물도 자아, 즉 나이고 동시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나의 모습도 나라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해석에 주목하고자 한다. 상술하지는 않았지만, 자아 추구적 자아는 해석주체로, 인성 관리적 자아는 해석의 대상으로 규정된다. 어느 쪽의 자아도 해석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해석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 위해 새로운 학자를 끌어오고자 한다.



폴 리쾨르 - 해석에 관한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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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1913~2005)는 자크 데리다, 위르겐 하버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철학자로 해석학이란 영역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철학자이다. 여기서는 그의 주장 중 일부분만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리쾨르는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의 구조, 논리적 요소, 생성원리 등이 아니라 언어가 표현되는 담론과 그 담론에서 전달되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소쉬르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다른 유명한 언어철학자들과 다른 관점이다. 담론은 언어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억양이나 제스처 같은 비언어적 표현뿐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나 말해지는 환경 등 많은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 우리는 의미를 전달할 때 언어뿐만 아니라 많은 요소들을 감안해서 전달한다. 예를 들어, ‘잘했다’는 말은 억양,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180도 변화한다. 따라서 해석은 이런 요소들을 다 고려해서 그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해석은 절대적일 수 없다. 리쾨르 역시 그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각자의 기준, 담론의 상대에 대한 나의 판단, 나의 현실 등 수많은 요소들에 묻혀 해석하기에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다. 해석이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다양한 주관들이 다양한 해석들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조금 더 나아가보면 완벽하게 같은 해석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리쾨르는 또한 이 해석이 자신을 재구성한다고 주장한다.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불리는 이 구성은 간단하게 설명하면 ‘해석(인식)이 이루어지면 - 해석에 따른 나의 판단, 행동 변화하고 - 이것은 다시 해석에 영향을 끼친다.’로 정리할 수 있다.

 리쾨르의 담론은 고프먼의 자아와 닮아 보인다. 자아의 연기 역시 보이고 싶은 나의 모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극이 이루어지는 무대의 상황 모두를 감안해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자아 역시 담론과 같이 해석에서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이것을 기초로 같은 연기된 자아도 수많은 모습으로 해석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즉 나의 자아는 무궁무진한 해석을 낳고 동시에 나는 무궁무진한 타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연기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해석(판단)이다. 타인에게 알맞은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판단, 즉 타인이 보여주는 자아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내가 연기한 자아가 의도대로 연기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추측을 해야 한다. 이것 역시 타인의 자아를 해석함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쪽이든 판단은 내 연기의 대본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판단을 결정하는 나의 ‘기준’이다.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된다. 내 연기는 타인에게 알맞은 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그것을 위해 내 연기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나의 판단이며, 타인에 대한 판단은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 의해 이루어진다. 결국 내 연기는 돌고 돌아 내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이 수많은 연극의 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 연극의 해석, 관람과 나의 기준

 기준이란 무엇일까? 기준은 어떻게 세워질까? 이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천재적인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긴 시간 동안 연구해왔고 그 결과 많은 결론들이 나왔지만, 그것을 집대성해서 하나의 기둥을 세우기에는 필자는 너무 부족한 면이 많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다. 바로 ‘기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준은 곧 나 자신의 철학이라는 장대한 것임과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라는 매우 간단한 것이기도 하다. 타인과 사회라는 틀에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나라는 진액이 가득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필자의 전공 교수님 중 한 분은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지 말아라. 생각하는 것에 게으르지 말아라.”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 그러면서 깊게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인 것이 사실이고, 하지 않고도 살아가는데 문제는 없다고 말씀해주신다. 맞는 말이다. 나 자신의 기준이 어떤지 생각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일상의 행동 하나하나를 결정하는 것이 나의 기준인데, 귀찮다고 해서 넘기기에는 너무 크지 않을까?

 일상이 연극이라는 것은 내가 만나는 일상이 수많은 연극을 관람하는 시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편한 마음으로만 볼 수 없는 만만치 않은 연극들이지만, 이 연극들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극장에서 연극을 볼 때처럼 많은 것들을 느끼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먼저 자신의 기준을 돌아보자. 그것은 나만의 가이드라인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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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프먼과 리쾨르에 대해 글을 적을 정도로 깊게 공부하지 못했기에 필자의 글에 부족한 점들이 많은 점 죄송하게 생각하고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만약 지적할 부분이 있다면 댓글이나 이메일로 남겨주시길 부탁드린다. 혹여나 질문이나 대화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역시 이메일이나 댓글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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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프먼에 대한 부분은 상기한 장현미 선생님의 논문 (커뮤니케이션 이론 제10건 2호에 수록)과 고프먼의 저서 '자아연출의 사회학'을 참고했다. 고프먼에 대해 더 알고싶다면 이 두 문헌을 추천한다. 리쾨르에 대한 부분은 필자가 전에 들었던 대학 수업의 교재와 필기를 참고해 서술했다. 리쾨르의 저작과 관련 도서들이 너무 많기에 추스려 추천하지 못하는 점 죄송하게 생각한다. 네이버 블로그 '본향을 찾아 떠나는 철학쟁이 나그네'에 리쾨르를 검색해본다면 그의 저작에 대한 자세한 해석들을 볼 수 있다.


[김찬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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