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재가 되어 흩뿌려진 산불 [공연]

전쟁 속에서 피어난 비극적 사랑
글 입력 2017.11.0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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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얼마 전, 차범석 작가의 희곡 <산불>이 국립창극단이 선보이는 창극으로 다시 무대에 올랐다. <산불>은 현대 희곡사의 걸작으로 손꼽히며, 사실주의 희곡으로써 한국 전쟁이라는 참혹한 배경 속에서 인간의 죽음과 비극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민족의 참극, 한국 전쟁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앗아가 버렸다. 이념적 갈등과 사회적 대립 속에서 발생한 한국 전쟁은 분단국가의 고통을 낳았으며, 가슴 아픈 민족의 상처와 큰 멍에를 남겼다. 이렇듯 비참하고, 참혹한 전쟁 속에서 <산불>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Synopsis.

 어느 지리산 자락 한 마을, 전쟁으로 마을의 남자들은 반동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과부들만이 남아 고통과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간다. 극의 주인공인 점례와 사월은 전쟁이 휩쓸고 간 비참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과부로 등장한다. 점례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현실과 타협하며 꿋꿋이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인물이지만, 사월은 전쟁이라는 상황에 맞서 갇혀진 인간 본연의 삶과 욕구를 당당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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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빨치산에서 몰래 도주한 규복이라는 남자가 점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점례는 마을 사람들 모르게 규복을 대나무 숲(대밭)에 숨겨주고, 보살펴준다. 점례와 규복은 서로 사랑을 나누며, 둘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사이가 된다. 그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월은 점례의 비밀을 지켜주는 대신 자신과 규복을 같이 공유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세 남녀의 비정상적인 관계와 은밀한 사랑은 대밭에서 아무도 모르게 시작된다. 결국 사월은 규복의 아이를 임신하고, 도주한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내려온 국군은 대밭에 숨어있던 규복을 사살한다. 사월은 파국으로 치닫는 자신의 삶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규복이 숨어있던 대밭은 불을 질러 태우게 되고 이렇게 극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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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속에서 시작된 비극적 사랑

 극에서 보여지는 점례, 사월, 규복 이들의 비정상적인 관계와 비극적 사랑은 참혹하고, 비참한 전쟁 속에서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려지게 된 인간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며 매일을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야 하는 전쟁 속에서 인간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며 정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창극 <산불>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그 내면을 깊게 파고 들었으며, 이 모든 것이 전쟁으로 시작된 비극임을 통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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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월은 극에서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욕정으로 가득 찬 인물로, ‘성’에 대한 집착과 욕망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사월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만을 갈망하는 인물이 아니라, 당시의 전쟁이라는 상황이 만들어낸 인간의 극단적인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사월의 대사 중 “남편 잃은 젊은 과부가 사내를 그리워하는 게 죄요? 우릴 이렇게 만든 세상이 죄지. 내가 왜 죄요.” 이 부분은 전쟁 상황 속에서 나타난 비정상적인 삶의 방식이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사회가 만들어낸 인간의 정상적인 열망에 대한 소리임을 느끼게 한다.

 
 
무대의 공간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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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창극 <산불>에서 주목할 것은 무대 위의 공간 설정이다. 무대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담아내기 위해 추락한 폭격기의 뒷날개 부분이 보이고, 그 앞에는 대나무 숲(대밭)이 거대하게 우거져있으며, 그 아래로 점례와 사월의 작은 집이 보인다. 무대는 회전이 가능한 나선형의 무대장치로 장면마다의 구분과 함께 전쟁의 폐해로 어둡고, 우울한 마을을 형상화했다. 특히 대나무 숲(대밭)은 삶과 죽음의 동시적인 공간으로써, 전쟁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의지와 욕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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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극에서 중간 중간 등장하는 까마귀는 극에서 재미와 희극적인 요소를 위한 것도 있겠으나 전쟁이 만든 비극적인 상황을 다양한 움직임의 표현으로 더 풍부하게 극을 채우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마을에 남겨진 아낙들을 바라보는 죽은 자들은 마을을 떠나지 못한 채 한(恨)이 서린 구슬픈 소리로 쓸쓸하고 스산한 대밭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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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창극 <산불>은 국립극장에서 55년 만에 다시 한 번 무대에 오르게 되어 많은 이들의 기대와 관심으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산불>은 창극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와 소리로 현대적인 기술과 함께 재해석되어 관객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창극 <산불>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맞게 애절하고도 한이 서린 우리의 전통 소리로 극을 자연스럽게 풀어나갔으며, 무대 장치와 극의 부수적인 요소들 또한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 그 의미를 담고 있어 창극만이 줄 수 있는 감동과 재미로 극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국립창극단원들의 뛰어난 연기와 소리로 전통적인 소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현대적인 요소와 다양한 방식으로 새롭게 재해석한 <산불> 공연은 과감하고 신선한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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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소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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