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선을 비트는 강렬함, '엠, 버터플라이' [공연예술]

데이비드 헨리 황의 희곡 '엠, 버터플라이'
글 입력 2017.10.30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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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 주둔한 미군 핑커튼(Pinkerton) 경은 그곳의 초초상(Cio-Cio San)이라는 게이샤를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핑커튼은 결혼에 진지한 관심이 없었고, 얼마 후 초초상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초초상은 핑커튼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그가 언젠가 ‘버터플라이!’라고 자신을 부르며 돌아올 날만 꿈꾼다. 그러나 그가 부푼 꿈을 안고 미국으로 찾아간 날, 초초상은 핑커튼의 아내에게 그녀의 아들을 빼앗기고 만다. 결국 초초상은 자결하고, 그제서야 핑커튼은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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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엠, 버터플라이(1993)>
 

1904년 초연된 푸치니의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의 내용이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비극적인 스토리가 어우러져 수많은 관객들이 눈물 흘리게 만든, 지금까지도 인기 있는 오페라이다. <마담 버터플라이>가 초연 된지 약 80년이 지난 1988년, 데이비드 헨리 황이라는 중국계 극작가가 <엠, 버터플라이>라는 극을 올렸다. <마담 버터플라이>의 내용을 차용하면서도, 그것을 교묘하게 비트는 극인데, 배경은 중국과 프랑스로 옮겨 갔다. 주인공 갈리마르(Gallimard)는 중국의 프랑스 대사로 일하면서, <마담 버터플라이>에서 초초상 역할을 연기하는 송(Song)을 만나 그에게 푹 빠지고 만다. 그들이 처음 만난 날 밤, 송은 이렇게 말한다.
 

: 그게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판타지죠, 안 그래요? 순종적인 동양여자와 잔인한 백인 남자 말이에요. (…) 이렇게 생각해보죠. 만약 금발의 인기만점인 여자가 키 작은 일본인 사업가에게 사랑에 빠진다면 어떻게 말하실 건가요? 그 남자는 그녀를 아주 잔인하게 대하고, 집에 돌아가 3년을 돌아오지 않죠. 그 동안 그 여자는 그의 사진을 보면서 기도하고, 심지어는 젊은 케네디 대통령의 청혼까지 거절해버려요. 그리고 그 일본 남자가 이미 결혼을 해버렸다는 사실을 안 여자는, 스스로 자결해버리죠. 자, 그럼 당신은 이 여자를 미친 바보라고 생각하겠죠. 안 그래요? 하지만 서양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동양 여자라면, 당신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거죠.

희곡 <엠, 버터플라이>에서, 직접 번역

 
송의 이 대사는 푸치니의 오페라를 보며 감동했던 갈리마르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일침을 날린다. 그리고 바로 이 대사는 송이 갈리마르를 사로잡아 그를 바닥까지 떨어뜨린 비결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순종적인 동양 여자에 대한 백인 남자들의 판타지, 송은 그것을 이용해 갈리마르를 속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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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시선의 차이’가 이렇게도 위험하다. <엠, 버터플라이>라는 이 희곡을 읽지 않았다면, 나 역시 푸치니의 <마담 버터플라이>를 보고 그저 아름답다고만 느꼈을 것 같다. 동양인인 나조차도 동양 여자의 맹목적인 순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동서양의 힘의 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 수 있다. 이 작가는 그 뿌리를 뒤흔들며, ‘송’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다시 생각해보라 말한다. 비단 동서양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남녀 사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송은 수동적이고 부끄러움을 타는 여성의 모습을 연기하면서, 그런 자신의 모습이 남성 갈리마르의 ‘힘’에 대한 억눌린 욕망을 자극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용한다. 갈리마르가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환상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는 것을 떠올리면, 이 극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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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스컬처

 
송의 대사와 함께 관객에게 함께 시선을 비틀어보자고 제안한 작가는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충격적인 전개와 함께 그만큼 아리송한 질문들을 독자와 관객에게 던진다. 중요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동성애에 관한 문제, 사랑과 권력,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오묘한 경계까지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함의는 무궁무진하다. 갈리마르는 송을 사랑한 걸까 아니면 송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걸까? 그가 원했던 것은 송 그 자체인 것일까 아니면 송이 연기한 ‘버터플라이’라는 환상인 걸까? 작품은 답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질문을 던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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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국내에서 초연되었던 <엠, 버터플라이>가 2014년, 2015년 앵콜 공연을 거쳐 올해 다시 돌아왔다. 대중적인 내용이 아닌데도 꾸준히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공연을 이어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 작품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오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나는 희곡을 먼저 읽은 뒤, 얼마 전 대학로로 실제 공연을 보러 갔다. 텍스트가 가지고 있었던 강렬함이 배우의 연기와 무대 장치, 음향 효과 등으로 더욱 극대화되는 것을 느꼈다. 희곡으로 먼저 접해서 극의 오묘함을 완전히 표현해내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작품이 던지는 기본적인 문제의식만큼은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는 연극이었다. 흡입력 있으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공연을 찾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텍스트를 먼저 읽고 가면 더 재미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강렬할 것이다. 당신은 시선과 환상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자문해보시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2017년 12월 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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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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