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케빈에 대하여" [영화]

엄마에게 지워진 모성이라는 원죄
글 입력 2017.10.22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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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이가 천사는 아니다.

“아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아직 부모가 되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더라도 이 말이 갓 부모가 될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추측해 볼 수는 있을 겁니다. 한 생명이 독립된 개체로 자라는 과정이 오롯이 내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 그것은 벅찬 기쁨과 동시에 막연한 부담감이나 두려움으로도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처음부터 부모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이러한 영역은 추측으로만 가늠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통과의례는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그 “미지”에 나뿐만 아니라 또 다른 생명도 함께 포함된 것이라면 그 두려움은 배가 되겠지요.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보면, 생명의 탄생은―많은 매체들이 지금껏 너무도 쉽게 그래왔듯―경이로움이나 축복보다는 공포의 이미지에 훨씬 더 많이 닿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바로 그런 ‘두려움’의 시선에 주목하여 탄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엄마인 에바의 시선을 중심으로 그녀의 아들인 케빈과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여행작가로서 자유로운 삶을 즐기던 에바는 갑작스럽게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됩니다. 부른 배를 안고 즐거운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다른 임산부들 사이에서 에바는 이질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케빈이 태어나고서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기쁜 표정으로 아이를 안아드는 남편 옆에서 에바는 세상에서 가장 낯선 존재를 보듯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 시끄러운 공사장에 유모차를 끌고 가고, 겨우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아이에게 “네가 태어나기 전이 훨씬 행복했다”고 말하는 에바의 모습을 보면 과연 그녀에게 최소한의 모성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에바에게 무언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과거회상 장면에서 보이는 큰 집과 사랑하는 남편과 딸은 온데간데 없고, 그녀의 팍팍한 일상은 별 볼일 없는 직장과 아들의 교도소 면회를 가는 것이 전부지요. 에바는 마치 사건의 단서를 쫓아가듯 케빈이 태어나기 이전의 시간부터 집요하게 하나하나 과거를 회상해 되짚어 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건”이 일어난 당일에서 에바의 현재와 과거가 맞물리는 순간, 에바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잔상들이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 또 그녀의 아들은 왜 교도소에 가 있던 것인지에 대한 이유가 밝혀집니다.

영화의 초점은 철저히 에바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건의 당사자인 케빈이 어떤 비난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대신 세상과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게 닿지 못하는 비난의 화살이 에바에게 대신 쏟아지는 모습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죠. 그녀의 이웃은 범죄자의 엄마인 에바에게 저주를 퍼붓고 에바 또한 당연한 듯 그것들을 감수합니다. 만약 자녀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비율로 나눌 수 있다면 그 중 부모의 책임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이웃들에 비해 비교적 일의 전모를 잘 아는 우리 관객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에바에게 원론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모가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케빈을 태어나게 한 것은 결국 에바와 그녀의 남편 프랭클린이니까요. 하지만 케빈이 그렇게 끔찍한 학살을 자행한 범죄자가 된 것 또한 모두 에바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아이”였던 케빈은 그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은 에바로 인해 사이코패스가 되고 만 걸까요?



아들을 두려워하는 엄마. 하나지만 독립된 두 개체.

위의 논의를 하기 위해서 먼저 케빈과 에바는 과연 서로를 사랑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누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이 모자의 관계를 그려내는 방식은 스릴러 혹은 공포 영화의 그것입니다. 과거 케빈을 임신했을 때 에바의 불안한 표정, 음산한 화면과 사운드 등은 스릴러 영화에서 서스펜스를 배가할 때 흔히 쓰이는 방식이죠. 또한 에바가 출산을 하는 장면은 수술용 거울에 비친 에바의 일그러진 상과 소름끼치는 비명을 통해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집니다. 이러한 화면들은 에바에게 “아들”이란 존재와 함께 다가올 모든 것이 얼마나 공포스럽게 느껴지는지 잘 드러내고 있죠.

아니나 다를까, 마치 에바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케빈과의 하루하루는 그녀에게 지옥 같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기를 어르고 달래 보아도 아이는 울음을 그칠 줄 모르고 에바는 점점 지쳐갑니다. 그리고 남편 프랭클린은 그녀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죠. 아이가 점차 말을 알아듣게 되자 그녀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녀의 아이도 그녀만큼이나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죠. 처음엔 그저 어린 아이의 심술로만 보였던 케빈의 행동은 에바를 향한 악의를 점차 명확하게 갖춰가고, 에바는 그런 케빈에게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녀에게 소위 말하는 “모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다름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들킨 것이니 말이죠.

어린 아들을 두려워하는 엄마라니. 하지만 확실히 케빈은 어딘가 비범한 구석이 있는 아이가 맞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엇을 무기로 사용해야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는 에바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에바가 케빈에 대한 화를 참지 못했을 때 그의 팔의 난 상처를 이용하는 모습은 소름끼치기까지 하죠. 태연하게 간호사와 아빠에게 거짓말로 엄마의 잘못을 덮어준 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엄마에게 의도적으로 상처를 가리켜 문지릅니다. 전 세계를 누비며 유명한 여행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에바는 이제 없습니다. 아들에 대한 죄책감과 의무감으로 구성된 세계에 에바는 케빈과 함께 고립되어 버립니다.

“좋아하는 거랑 익숙한 건 달라.
엄만 내가 익숙할 뿐이잖아.”

유년기의 케빈은 동생이 태어나면 너도 좋아하게 될 거라는 엄마의 말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에바는 이런 케빈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케빈의 사건 이후 2년이 지난 현재에서 보여지는 에바의 행동도 “익숙함”의 연장선에 불과한 것일까요? 이제 그녀의 곁에는 남편도, 살인자 아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나무랄 이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정기적으로 아들의 면회를 가고, 주인 없는 아들 방에 페인트칠을 하고, 옷을 개어 넣습니다. 사실 에바는 그동안 꾸준히 아들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케빈이 익숙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에바만의 최선의 사랑의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요령이 없어서 그 결과가 극복할 수 없는 둘 사이의 몰이해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더라도 말입니다.



모성이라는 엄마의 원죄

에바는 영화에서 끊임없이 버팁니다. 그것이 아들 케빈과의 관계이든 세상의 멸시이든 말입니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피해자 부모들의 질타에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영화 속에서 그녀를 옭아매는 것들은 전부 붉은색의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에바의 집과 차에 누군가가 쏟은 빨간 페인트, 마트에서 피해자의 엄마를 피하기 위해 숨었던 진열장의 토마토 수프, 아무리 떼어내도 면접장에서 조차 머리칼에 붙어있는 빨간 액체까지. 영화의 첫 장면은 토마토 축제에서 붉은 토마토 조각으로 범벅이 된 채 사람들에 떠밀려 가는 에바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분명히 축제의 한 장면인데도 불구하고 뒤엉킨 사람들을 화면에 가득 담은 장면은 언뜻 살육의 현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마치 벗어날 수 없는 불행의 굴레에 갇힌 그녀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케빈의 탄생을 기점으로 에바의 인생은 망가졌습니다. 약간의 부주의과 무책임이 낳은 결과 치고는 아주 무시무시했죠. 에바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감내합니다.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지워진 모성이라는 붉은 원죄를 수행자처럼 받아들입니다. 에바는 누구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과연 그 원죄의 실체가 있는지 조차 반문하지 않습니다. 대신 에바는 집에 쏟아진 붉은 페인트를 다른 색으로 뒤덮거나 하지않고 닦아내고, 또 닦아냅니다. 이것이 그녀가 원죄를 받아들이고 또 동시에 그에게서 해방되려는 방법입니다.

케빈이 성인교도소로 옮겨갈 날을 며칠 남겨두지 않고 만난 마지막 면회에서, 에바는 처음으로 살인자나 사이코패스의 모습이 덧칠해지지 않은 아들의 맨 얼굴을 보게 됩니다. 비로소 그 나이 또래 아이처럼 두려워하기도 하고 혼란스러워하기도 하는 아들을 보며 에바는 드디어 아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아들을 힘껏 안아주는 에바의 얼굴에선 참으로 여러 가지 감정이 읽힙니다. 면회를 마치고 길을 나서는 에바를 보며 문득 케빈이 성인 교도소로 옮겨간 후에도 그녀가 면회를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죄의식이 실체가 없었음을 확인해서였든, 그토록 찾아 헤메던 모성의 자리를 찾았기 때문이든 말이죠.


[한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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