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 책이 쓰이고 읽히는 방식_인생의 일요일들

글 입력 2017.09.22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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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햇빛으로 반짝이는 지중해에서 가장 반짝이는 나라 그리스, 아름답고 슬픈 신화들을 줄줄이 잉태한 그리스, 철학자들이 거닐고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던 뜨거운 광장을 품고 있는 그리스, 한 때 일등으로 달리던 주자가 이젠 가장 끝에서 앞서가는 후배들을 노을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한, 그런 그리스. 그곳에 저자의 눈이 오랫동안 머문 것들은 작고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면 볼 수 있고 눈을 흘깃하면 가까워질 수 있지만 쉽게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것들 말이다. 태양, 제비, 하늘, 나무, 돌고래, 당나귀, 별, 일몰. 이런 것들은 응시하지 않으면 차창 밖으로 뭉개진 채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처럼 나의 곁을 스쳐 지나가 버린다.


 한여름인데도 양모로 만든 두터운 망토를 걸친, 덩치가 큰 양치기였어.
햇볕에 그을리고 수염이 잔뜩 나고 눈이 깊고
양의 뿔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있는 양치기 뒤로 점점 더 많은 양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었어.
그 뒤로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보였는데, 아직 어린 소년들이었어.
 소년들은 순진한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보았어.
얼떨결에 나는 양치기 가족에게 마치 작별인사를 하듯 손을 흔들었어.
어쩐지 그 가족이 마음에 들었어. 양치기와 가족들도 손을 흔들었어.



 기원전 4세기에 지어졌다는 아폴로 에피쿠리오스 신전을 보기 위해 차를 타고 산으로 가던 중, 저자는 도로 위에서 늑대나 다름없는 개 네 마리를 마주친다. 시퍼런 이빨을 번뜩이며 쫓아오던 개들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를 쫓아 쫄래쫄래 돌아간다. 차를 멈추고 보니 앞으로는 어린 양 두 마리가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휘파람의 주인 양치기가 한 번 더 휘파람을 부니, 개 한 마리가 양 두 마리를 데리고 간다.

 하얀 양떼와 윤기 있게 반짝이는 털을 가진 개들, 양치기 가족, 그리고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으나 서로가 손을 흔들어 보이는 찰나를 저자는 기록한다. 언제부터 손을 쫘악(어쩌면 살짝 굽힌 채) 오른쪽, 왼쪽으로 저어내는 것이 만국공통어가 되었던 것일까. 전 세계 어느 도시, 어느 마을에 가든 상대의 안부를 묻기 위해, 반가움을 표시하기 위해, 아쉬움을 보이기 위해, 호기심을 기분 좋게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단순히 단풍잎 같은 손 한쪽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면 되는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지만, 겨우 이거 하나 통한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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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마니 


 “선박 사고가 나서 아이들이 몽땅 죽은 곳이 한국 아니요? 
장과 그 일을 저지른 모든 놈들에게 저주가 있기를 …“

 “그 애들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래, 그 애들의 부모는 어떻게 살고 있소? 그 애들의 형제자매는 어떻게 살고 있소? 
...
그  애들의 책과 옷은?”

“당신은 얼마나 괴로웠소? 당신도 괴로웠을 것 같소.”
“당신은 괜찮소? 별 문제 없소?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소.”


 심장에 담아 두었던 뜨거운 물이 철렁, 넘쳤다. 2014년 4월 16일, 우리 모두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고, 티끌만큼도 나아지지 않은 이름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아침에 눈을 떠서 뉴스를 봤을 때의 충격, 의지와 상관없이 멈출 수 없었던 눈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침몰한 배의 형체. 그 옆에 선명히 떠오른 실종자 수.

 사람 여섯, 고양이 넷, 개 둘만이 살고 있는 마니에서 뜻밖의 위로를 받았을 때, 저자는 그 벅찬 마음을 과연 참을 수 있었을까? 그저 몇 줄 글로 어루만져진 나조차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차오르는데 말이다. 마니는 그리스의 끝이자 폐허만 남은 으스스하고 적막한 도시라고 했는데, 정말 무서운 곳은 어디인가? 제대로 된 위로란 무엇이며, 진심은 또 어디에 있는가? 그 사건에 대해 줄을 잇는 질문들이, 망자를 기리는 마니만의 노래인 ‘만가’와 같았다고 저자는 회상한다. 이국에서 추모의 경험을 함께하고 그 속에 깊이 스며들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면 저자가 보고 들었던 것은 일상적이지만 가장 일상적이지 않은 것들이다. 그래서 그녀의 여정이 기어코 부러워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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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모넴바시아 성채


 생각여행. 그녀는 자신의 여정에 이렇게 이름 붙였다. 이는 동시에 내가 <인생의 일요일들>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의 삶과 길 위에서의 나날들, 당장 지금 이 순간에 머릿속을 맴도는 단상과 그곳에서 마구잡이로 떠올랐던 생각들은 그들이 탄생한 시간도, 장소도, 공기조차 다른데도 불구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실타래로 이어지곤 한다. 원래부터 시작점이 같은 것처럼. 그들의 배꼽과 배꼽을 잇는 탯줄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넴바시아 성채에서 저자는 아이의 발길을 뒤쫓아 가다 야니스 리초스라는 시인의 동상을 마주친다.


‘죽음이란 새로 태어나는 새싹을 위해
땅에 떨어진 낙엽에 불과하다’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리초스의 시가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잃어버린 형제를 찾아가는 것처럼 홀린 듯 그것을 마주한다.
 
 
아마도 숨어 있는 소녀 곁에 동무하러 가는가,
고적한 저넉 어둠 속에, 달의 세 번째
네거리에,
가로등도 꺼진 저 은빛 막다른 골목에

- 부재의 형태 中 -


 서울에서 읽은 리초스의 시 속에서 그녀는 리초스를 처음 알게 된 모넴바시아 골목길을 떠올린다. 그리스에서의 기억이 현실의 기억과 손을 맞잡는 광경이다. 그녀의 생경한 경험은 나를 또 다시 길 위에 데려다 놓는다. 프라하에서 우연찮게 들어선 무하 박물관이 떠오르고, 그 일로 인해 한국에서 알폰스 무하 전시를 가고, 체코문화원 행사에 참여하고, 체코라는 단어에 매번 설렜던 모든 순간이 마음 속을 부유한다. 바로 이것이 <인생의 일요일들>이 쓰인 방식이며, 동시에 읽히는 방식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정체성을 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조금 다른 정체성 선택’이 제임스 조이스의 일상 탈출법이었어요.
...
사랑스러운 개의 주인이자 식물 애호가라는 정체성은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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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나무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저자는 그녀가 전하는 수많은 ‘일요일들’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묻혀 놓았다. 하늘과 바다, 폐허 앞에서 그녀는 인생의 멘토인 존 버거에게 자신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답게 행동했는지, 꼭 필요한 사람이란 느낌만 즐겼는지를 묻는다. 담벼락보다 아주 조금 높은 교회의 둥근 지붕을 보며 아침을 깨우는 기도를, 아침만큼이나 확실했던 약속들ㅡ돌아올 때 맛있는 것 사올게, 힘들면 연락해. 너에겐 내가 있잖아ㅡ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스파르타의 올리브 숲에서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고통, 그 속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초라한 고통에 대해 생각한다. 전투, 정복자와 노예, 왕의 가계도, 이별, 고뇌로 가득한 눈빛, 신의 인자한 눈길이 없는 크노소스 궁전 벽화를 보며 한들한들 행복해한다. 그녀의 정체성이란, 참으로 해맑고 따듯하며 겸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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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산토리니


 벌써 3주나 지나버린 9월은 무기력하고 지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원치 않는 일들에 매몰되었고, 쉴 틈 없이 시간은 달려나갔으며, 그것을 쫓고 쫓다 결국엔 나가떨어진 패자의 기분으로 지냈다. 그토록 정신 없는 와중에 띵동-하고 도착한 <인생의 일요일들>은 잊고 있었던 선물이기도, 예상치 못했던 불청객이기도 했다. 글을 쓰기 위해 주어진 시간 안에 책을 모두 읽어야만 했고, 잠 잘 시간조차 가까스로 낼 수 있었던 일상에 책을 하나 더 얹는다는 것은 찰랑찰랑한 물잔에 물 한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숨막히는 일이었다. 처음엔 미안할만큼 삐뚫어진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던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의 일요일들>은 오히려 답답한 가슴에 숨구멍을 틔워주었다. 한숨밖에 흘러나오지 않던 입가에 미소를 가져다 주었고, 다시금 지난 여행들을 되짚어보게 했다. 당장 눈 앞에 산적한 과제들이 아닌 지중해의 바다와 폐허의 공허함으로 흐릿한 동공을 씻어내주었다. 말그대로 이 책은 일요일다운 일요일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극적인 일요일을 선사해주었던 것이다.

 리뷰를 위해 책 전체를 한 번에 읽어버렸지만, 39편의 편지로 이루어진 <인생의 일요일들>은 매일 자기 전에, 아니면 하루를 시작 하기 전에 한 편씩 꺼내어 읽어보길 추천한다. 특히 삶에 찌들어 모든 걸 던져버리고 싶은 이들에겐 더욱 그렇다. 요즈음의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기쁜 건 기쁘다고, 슬픈 건 슬프다고, 못난 건 못났다고, 잘난 건 잘났다고 표현하고 인정할 줄 아는 저자와 하루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눠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가뿐한 아침, 혹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밤을 만나볼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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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들은 구글 발췌로, 도서와 무관합니다.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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