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 마음을 예쁜 편지지에 꾹 눌러 담아서.

2017.09.20
글 입력 2017.09.2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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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팔찌와 편지와 마음

나를 좋아해주던 친구가 있었다.

두 번째 초등학교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그 반의 반장으로,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그 아이.

좋아하는 감정을
괜스레 더 놀리고 괴롭히는 행동으로 표현했던
또래 아이들과는
참 달랐던 것 같다.

아이는
학교가 끝난 뒤 청소를 하고 돌아오면
그 마음을 항상 예쁜 편지지에 꾹 눌러 담아
나의 책상 속 서랍 안에 넣어주곤 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던 날.
짧은 이별이 아이에겐 유독 아쉬웠는지
그 날은 직접 편지를 건네주며
작은 선물도 주었다.

작은 구슬로 엮은 팔찌였다.

규칙을 이루며 줄을 이룬 파스텔 색의 구슬과
풀리지 않기를 바라며 꽉 매듭지은
엉성하면서도 따스한 팔찌였다.

아마도 아이는
작은 구슬로 무언가를 만들기 좋아했던
나를 눈에 담아두었나 보다.

그 마음이 고마워,
그 마음이 나와 같지 않음에 미안해,
팔찌를 한번도 해보지 못한 채
참 오래오래 간직했었다.

자기 전 일기를 쓰고
책상 정리를 하면서
한번씩 꺼내어 보던 그 팔찌는
순수했던 아이의 마음이 엮어져 있어
언제나 예뻤다.




ps. 나에겐 세가지의 초등학교가 있다. 1학년부터 2학년 중순까지 다녔던 첫 번째 초등학교, 2학년 부터 3학년 후반까지 다녔던 두 번째 초등학교, 그리고 그 이후에 쭉 다녔던 세 번째 초등학교. 1년 반 조금 넘게 다녔던 2번째 초등학교는 짧은 기간에 비해 추억이 꽤 많은데 위의 글도 그 중 하나이다.

팔찌는 아쉽게도 4-5년 정도 보관한 뒤 사라졌다. 그래도 그 생김새는 참 선명하다. 자주 눈에 담았기 때문인가 보다.





#26 가을

번거로운 겉옷을 입지 않아도
마음껏 뛰어다녀도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을 너무나 사랑했다.

가을이 언제 오냐고 묻는다면
여름의 더위가 유독 기승을 부려
태양을 원망하던 날들의 끝에
성큼 찾아온다.

얇은 홑겹의 이불이
춥게 느껴졌던 그날 밤이 지나고
아침에 학교를 나서는 그 순간에
성큼 찾아온다.

그 가을은
내가 청량하고 높은 하늘과
조금 더웠던 낮의 햇살을 마음껏 즐기고,
뛰어 노느라 달아오른 얼굴을
시원한 무향의 가을 바람에 식히며,
서서히 물들어가던 낙엽을
끝내 땅에서 줍게 될 때까지
참 천천히 흘러가주었다.

요즈음엔 가을이
변화하는 모든 것들을 느낄 틈도 없이
뭐가 그리 급한지
휙 가버리는 느낌이다.

친했다고 생각했던 계절인데.
1년에 한번씩 아쉬움이 머문다.




ps. 요 몇년간 제대로 가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몇 일 전 정말 가을다운 하늘과 날씨에 반해 예정에 없던 공원을 다녀왔다. 올해에는 그래도 아쉬움이 적을 것 같다.





#27 사전

나는 질문이 많았다.

특히 단어를 물어보며
그 뜻을 알고 싶어한 적이 참 많았는데,
그 궁금증은 할머니네에 있을 때에도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퇴근을 하고 돌아오신 할아버지께
저녁 시간 내내 궁금했던 단어를
한꺼번에 여쭤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줄곧 한문을 쓰시던 한지의 한 귀퉁이에
내가 적어둔 단어들이
기특했던 것인지

아직 겉옷 조차 벗지 않은
자신에게 급하게 물어오는
내가 웃겼던 것인지

허허 웃으시며
저녁을 먹고 난 뒤
궁금한 단어를 바로 알 수 있는
아주 신기한 책을 알려주시겠다고 하셨다.

너무나 길었던 식사 시간이 끝나고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침대의 머리맡에 두시는
오래된 책들 중 가장 두꺼운 책을 나에게 주셨다.
사전이었다.

그리고는
차근차근 단어를 찾고,
그 뜻을 읽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하루 종일 사전만 들여다 보았다.

모르는 단어가 생겼을 때만 열어보기에는
그곳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었기에
마음 내키는 곳을 펼쳐서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세상을 열어주셨다.




ps. 얼마 전 할머니네에 다녀왔다. 동대문구인 학교를 다니면서 성북구인 할머니네를 찾아간게 손에 꼽는 나는 참 나쁜 손녀라는 생각에 갑작스레 찾아갔다. 할머니께는 전화를 하고 찾아갔지만 내가 오는 것을 모르고 계셨던 할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시자 마자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더 자주 찾아와야지 다짐하며 오늘의 글인 사전을 떠올렸다.





#28 화분

2학년 2학기의 시작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의 책임감 기르기의 일환으로
작은 화분을 하나씩 가져오라 말씀하셨다.

엄마는 곧 화분 하나를 사다 주셨는데,
화분을 보자 마자 나온 말은

“살아있는 거 맞아?”

첫 만남에 면박을 주고 말았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줄기와 이파리가 가짜의 것처럼
빳빳하고 광이 도는 것이 참 의심스러웠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각자가 가져온 화분을 창가에 두고 살펴보는데
나의 화분에만 쏠리는 관심.

진위여부에 대한 관심이었다.

하지만 20여 개의 화분 중
여름 방학 전까지 살아남은 것은
단 하나, 나의 화분이었다.

그 아이는 참 잘 자라줬는데,
매일 물만 주면 된다는 복잡하지 않은 요구에
나는 매일 청소 후 착실히 물을 주었고
주말이 오기 전 날에는 다음날 보다 흠뻑 주고 갔다.

그리고 창가에 두기만 해도
가짜처럼 언제나 생생함을 지닌 채
잘 자라주었다.
그렇게 1년을 살아주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안전의 이유로 화분을 가져가라는 말에
집으로 오게 된 나의 화분은
머지 않아 죽고 말았다.

아이들의 생명력에 살았던 것일까?
가짜 같은 생김새에
잘 자라주는 것이 신기하여
반 아이들 창가에 한번씩 머물 때
안부의 인사를 건네던 것이 화분을 살게 했을까?




ps. 내가 유일하게 애정을 가지고 오랫동안 키웠던 화분이다. 글을 쓰며 다시 한 번 식물을 길러볼까 하는 마음에 얼마 전 손가락 만한 작은 선인장을 데려왔다. 15일에 한 번씩 물을 줘야 하는 사실을 잊을까봐 다이어리에 까지 체크해뒀는데, 오래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전문필진 명함.jpg
 


이미지 출처: 아이유 밤편지 뮤비


[정연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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