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상상이 현실을 지운 곳, 연극 - 동양예술극장 3관 [연극]

글 입력 2017.09.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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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더_포스터_도일.jpg
 

상상이 현실을 지운 곳, 네더(The Nether)
by. 제니퍼 헤일리

연출 이 곤 드라마터그 마정화

동양예술극장 3관
2017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 선정작





   가상세계. 익명이 보장되는 곳. 현실이 아닌 곳.
   내가 아닐 수 있는 곳이나,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곳.

   이러한 곳들을 사람들은 왜 원할까?
   이러한 곳들이 꼭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곳들에서 정말 나는 내가 아니며, 정말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나를 감추려 만드는 많은 공간들은 사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처절한 공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연극 <네더>는 그 치욕스러운 지점을 억세게도 꼬집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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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네더>는 가까운 미래 극단적 환상을 행하게 하는 가상세계를 만든 심즈와 그를 심문하는 모리스의 치열한 언쟁으로 시작된다. 심즈가 만든 가상세계 '네더'는 로그인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는 소아성애나 살인과 같은 비윤리적인 일들을 행할 수 있다. 네더 안에서 심즈와 우드넛 그리고 많은 남자 캐릭터들은 어린 소녀의 이미지를 한 아이리스와 사랑을 나누고 시간을 보낸다.

   가상세계에 관한 검열. 그것이 연극이 우리에게 던지는 표면적 의문이다. 현실의 금기가 가상세계에서도 지켜져야 하는가? 가짜공간일 뿐이고, 오히려 그 속에서의 감각이 현실보다 더 현실같아서 현실에서의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는 심즈. 그리고 모든 현실은 누군가의, 어디서부턴가의 상상에서 시작되었다는 모리스. 글쎄. 심즈의 말이 역하도록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거부하는 것 같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공간에서 욕망을 충족하는 것? 그것이 과연 현실과의 경계를 허물지 않을 수 있을까?

   연극이 내던진 표면적 질문에 대한 표면적 답은 언제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글을 굳이 대답에 초점 맞추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나로서는 심즈가 만든 가상세계와 그 안의 인물들이 너무나도 처절하고 치욕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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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감각 이런 건 덧없는 거요.
중요한 것은 관계요, 관계!"


   가상공간 네더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너무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갈망하는 소녀 아이리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제 손으로 아이리스를 죽여야한다. 가상공간을 둘러싼 경계에는 도끼가 걸려있고, 많은 캐릭터들이 (너무 가까워진 탓에) 아이리스를 죽여왔다고 심즈는 말한다. 처음 규칙을 들었을 때는 갸우뚱했다. 어차피 가상공간일뿐인데, 관계의 정도가 왜 문제가 된단 말인가? 아이리스도 말한다. 괜찮아요, 가상공간이고 나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요.

   이러한 네더의 규칙과 원리는 '내가 아닌 나'로서 생활하는 공간이 사실 가장 나다워지기를 욕망하게 한다는, 아주 모순적인 사실의 의미를 담고있다. 제맘대로 되지않는 현실에서 벗어나기위해 네더를 찾았지만 사실 네더를 찾은 모든 이들이 결과적으로 갈망하고 있는 건 '진정성 있는 관계'다. 익명을 위한 자신의 닉네임은 진실한 관계가 두려워 한꺼풀 덮은 일종의 방패막인 것이다. 온전한 자신으로서는 (현실에서 온몸으로 느꼈듯) 불가능하니 다시 새로이 시작하고 싶은 마음. 가장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새로 시작하고 싶은 것. 나로서는 이미 어그러진 것 같은 기분. 겁이 나는 내 모습을 감추고 싶은 마음.

   짜임새있는 극에는 다섯 인물이 나오지만 반전이 있다. 심즈를 중심으로 현실의 도일은 네더 속 아이리스고, 현실의 모리스는 네더 속 우드넛이다. 이들은 현실과 가상공간을 오가며 진실된 관계를 갈구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관계가 진실된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처절해진다. 그리고 가상공간 따위에서 '진심이었다'를 외치는 그들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을 결코 비난하거나 비웃을 수 없다. 게임처럼, 현실에서도 '리셋'이 가능했다면 그들이 이만큼 가상세계에서 진심을 논하고, 또 나눴겠는가?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도일


   다시 글의 도입으로 돌아가보자. 심즈가 만든 가상세계가 어쩌면 이해가 갈것도 같다. 물론 소아성애나 살인을 맘껏 행하는 비윤리적인 세계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랑이라 믿은 아이리스이자 도일, 그가 자꾸만 울컥 튀어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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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등장인물들에게 가상공간은 더 진심이고픈 공간이다. 내가 생각하는 네더는 그렇다. 처음엔 파렴치한 가상세계의 등장에 화도 났고 뻔뻔한 심즈의 행동이 기가 차기도 했다. 연극이 끝나고나니 네더의 탄생이 참 안타깝다. 그걸 이용한 심즈가 더욱 미워지고, 그런 이용에 넘어가는 도일을 비롯한 네더 속 사람들의 상황이 슬프다. 네더를 찾는 사람들은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다.

   '소아성애'를 옹호하는 세계가 등장하는만큼 보는 이들에 따라서 불편할 수도 있고, 뭐 이런 작품이 다 있냐며 비난할 수도 있다. (실제로 연극이 끝나고 나서는데 누군가가 "그냥... 변태 싸이코와 소아성애를 엮었네." 라고 하더라.) 그러나 이 극이 허용되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아이리스가 도일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닌 나, 혹은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은 편안하고 안정적이다. 그만큼 우리는 겁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안정은 잠시다. 금새 고독해진다. 나를 드러내고 싶고,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러니 그만큼 우리는 외로운 사람들이다. 결국 우리는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오로지 감정과 관계에만 집중할 수 있기를 바라는 거다. 도일은 그래서, 영원히 네더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나보다. 네더에서 그는(그러니까 아이리스 그녀는) 언제나 주목받고 사랑받는 존재였으니까. 연극 <네더>가 전하려 했던 극의 속내도 이러한 점이 아니었을까. 가상세계에서 익명으로 산다는 것. 이 평범한 설정은 비단 가까운 미래만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얼마나 절실한지, 동시에 현실이 아닌 곳에서 '그곳이 현실이기를 얼마나 바라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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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 적(연출 이 곤)과 드라마투르그 마정화의 합작은 믿고보는 공연이다. 치밀한 대사전달과 풍성한 동선, 표정과 동작, 탄성까지 보는 이들의 몰입을 돕는다. 밀도 높은 작품들만을 선정해 노련하게 번역, 혜화에서 선보이는 그들의 작품은 마주할 때마다 반갑고 또 고맙다.

   배우들의 연기가 누구 하나 어설픈 사람이 없어서 정말 좋았다. 극장이 꽤 큰 편이라 무대와 객석이 떨어져있었음에도 전달이 수월했다. 심즈 역의 김종태님의 절제와 전환이 자유로운 연기, 그리고 아이리스 역의 정지안님의 환상 속 인물표현 연기가 무척 인상에 남는다. 도일 역의 이대연님은 다른 배우들보다 비교적 비중이 적지만 등장 때마다 표정과 연기로 큰 임팩트를 남겼다. 물론 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았을 때 유일하게 행동/심경변화가 있는 역할이기도 하다.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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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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