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소아성애, 가상현실, 윤리, 전부 다 얘기해야만 한다.

글 입력 2017.08.3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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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네더>의 무대는 현실 세계와 가상 공간 ‘네더’, 이렇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극을 보는 동안 상반된 두 가지 생각이 내내 머릿속에서 진동했다. ‘지구도 모자라 저런 외딴 세계를 창조할 만큼 인간은 대단한 존재구나’ 하는 것과, ‘저기서도 법이니 경찰이니 하는 것들을 만들며 고생을 또 하는구나’ 하는 것. 그냥 여기서, 냉소로 넘겨버릴 법도 했으나, 그러기엔 <네더>를 만들어 낸 상상력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고 그럴싸했다. 여전히 <네더>가 던져준 질문들에 마음이 괴로워지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불쾌하지만은 않다. 또 다른 세계의 도래를 눈앞에 둔 세대에게는 분명 유익한 상념들이기에, 이들을 나눠보는 것 또한 유의미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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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무대 위는 가까운 미래,
인터넷 다음 세상의 어디.

사용자들은 로그인을 통해 ‘네더’로 들어가고 
또 다른 자신을 창조해
원하는 욕망을 마음껏 누린다.

이런 세상에서 형사 모리스는,
소아성애나 살인과 같은
극단적 환상을 만끽하도록 유도하면서 수익을 내는,
‘은신처’의 존재를 파악하고자
소유주인 심즈를 심문한다.

‘파파'라는 아이디를 쓰는 심즈는
19세기의 풍속과 취향을 현실보다
더욱 현실처럼 설정한 뒤,
가장 은밀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인물.

모리스는 그 공간의 불법성을 감지,
심즈의 범죄를 추적해 들어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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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성애, 가상현실, 윤리, 전부 얘기해야만 할까? 그래야만 한다.


 쾌락이 나쁜 건 아니다. 쾌락 없는 삶은 생각도 하기 싫으니. 하지만 윤리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쾌락이라는 게 있다. 소아성애나 살인이 그것이다. 파파라는 이름으로 네더에서 활동하는 심즈는 소아성애자다. 그는 이야기한다. 


"화학적 거세로도
자신의 욕망을 억제할 수 없다.
현실 속에서 온전하기 위해 나는
이 가상공간을 만들고 욕구를 해소해야만 한다.
이미지일 뿐인데, 뭐가 문제인가?
그들은 진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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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즈의 은신처에 과하게 몰입한 나머지 생명유지장치를 달고 남은 여생을 네더에서 보내고자 하는 도일은 이렇게 말한다.


내 딸은 나름대로의 삶이 있다.
난 여기서 살고 싶지 않다.
과학교사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았으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제 나는 쓸모가 없다. 파파는 나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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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더에 있는 자신들만의 은신처에서 어찌 해 볼 수 없는 욕구를 해결하고자 하는 두 사람을 향해 형사 모리스는 윽박지르고, 또 윽박지른다.


은신처는 불법이다.
현실에 있는 아이들(심즈와 도일의 자녀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
아이리스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심즈 당신에게 책임이 있다.




 소아성애, 가상현실, 윤리<네더>에는 한 가지만 다뤄도 벅찰만한 문제들이 얼기설기 뒤엉킨 채 표류한다. 과한 욕심이었을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모든 일에는 부작용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기 마련이다. 똑똑한 인간들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사실을 체득해왔고 때문에 ‘예방’이란 걸 시도했다. 하지만 예방이란 게 가능한가? 사전에 문제점을 방지하려 했으나, 그 실효성은 어땠는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은 전 세계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로봇이 상용화되었을 때,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가상 공간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끊임없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상상치도 못한 일들이 자행되곤 하는 게 인생이고, 역사가 아니던가. 어쩌면 그건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일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럴 리 없어’ 라고 쉬이 치부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네더>의 상상력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이것이 결국 예언이 되어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할 만한 대사건이 될지도 모르기에, 우리는 그들의 문제제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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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 인간의 소외 


 연극 <네더>는 이 복잡다단한 요소들을 엉성하게 던져 놓은 것이 아니라 매우 긴밀하게 엮어내고 있다. 특히 ‘화학적 거세로도 욕망을 제거할 수 없다’는 심즈의 발언과 ‘교사는 이제 현실에서 쓸모가 없다’는 도일의 발언에서 상상력을 구체화시키고 또 극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이 여실히 느껴졌다. 때문에 극은 단순히 피상적인 고민에 머무르지 않고 더 깊은 심연으로 나아간다.

 욕망을 해소해야 하는가, 억제해야 하는가? 현실에서 인간의 노동이 필요치 않아진다면, 인간에게 남은 건 쾌락을 충족시키는 일인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사람을 죽이는 게임은 용인되어야 하는가? 정도 차이일 뿐, 결국 인간의 내밀한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선 같은 것 아닌가? 게임은 단순히 우리에게 익숙하다는 이유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 공간이 완벽한 분리를 이룬다면 상관이 없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분리라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 이미지로 자신이 원하는 정체성을 얻을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긍정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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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내 머릿속을 뒤집어 놓던 수많은 물음표들은 가상공간에서 파파와 아이리스로 불리며  말하고 행동했던 인물들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은신처에서 했던 말과 행동을 고스란히 똑같이 선보이자 한 지점으로 모여드는 듯 했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심즈는 현실에서나 네더에서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파파라는 이름만 달고 있을 뿐, 모습은 심즈와 같았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가상공간을, 은신처를 예찬하던 이가 심즈였는데...

 사실 심즈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진짜 욕망은 소아성애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즈가 어떤 굴곡을 거쳐 왔는지는 극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그의 삶 속에서 결핍된 무언가가 그를 소아성애라는 왜곡된 ‘사랑’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무언가란, 아마 진실된 ‘사랑’ 혹은 ‘관계’였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은신처로 끌어들여 그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이미지로 존재하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심즈가 현실과 같은 모습으로 그곳에 존재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그 가상의 사랑도 진짜처럼 느껴졌을 테니.

 너무 거대한가? 너무 버거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벼울 수만은 없으니까. 모두를 대신해 이토록 어두운 걸 들여다보고, 고민과 함께 불어나버린 몸집을 무대 위까지 끌어다 놓은 극단 的과 작가 제니퍼 헤일리에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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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극은 9월 3일까지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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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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