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회복불가능성, 상실의 시대에 대한 잔인한 선고 : 김영하 < 아이를 찾습니다 > [문학]

글 입력 2017.08.26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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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은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미 결과가 생긴 이상, 결과의 존재유무는 원인이 결정하지 않는다. 미궁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붉은 실을 따라 밖으로 빠져나온 테세우스처럼, 원인이라는 놈을 없애고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원인을 없애서 현실이 바뀐다면 세상사 문제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간단해질 것이다. 그러나 미노타우로스를 죽여도 미궁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원인을 도려낸다고 해도, 바뀌지 않는 결과는 분명 엄존한다.
 
 
오직 두 사람.jpg
 


상실 이후의 삶

 
김영하의 단편 <아이를 찾습니다>는 원인을 도려내도 바뀌지 않는 현실의 암담함을 이야기한다. 윤석과 미라 부부는 아이 성민을 잃어버리는데, 이후 서로의 부주의를 탓하고 원망하다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놓고 11년 간 성민을 찾는데 골몰한다. 부부 관계도, 윤석과 미라 각각의 생애도 모두 뒤로 제쳐놓은 채, 자신들이 꼭 잡고 있지 못했던 성민이를 찾으며 볕들지 않는 불행한 나날을 전단지와 함께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돌아왔다. 전단지의 성민이와는 전혀 다른 아이가 퀴퀴한 불행의 냄새가 짙은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가 곰팡내 나는 좁은 화장실로 들어가며 미간을 좁히는 것을 윤석은 놓치지 않았다. 윤석은 얼굴을 붉혔다. 그동안 윤석은 모든 것을 유보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도배도, 수리도, 건강검진도 모두 성민이를 찾은 후로 미뤘다. 문제들이 산적된 채 썩어갔다. 시간도 없었고 형편은 쪼들렸다. 전단지 인쇄비와 기름값은 오르기만 하고 내리지는 않았다.
(p.63)
 
십 년간 그는 ‘실종된 성민이 아빠’로 살아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것이 끝나버렸다. 행복 그 비슷한 무엇을 잠깐이라도 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불행이 익숙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내일부터는 뭘 해야 하지? 그는 한 번도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민이만 찾으면, 성민이만 찾으면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 그 이후를 상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p.65)


윤석은 모든 불행이 ‘아이를 잃어버린’ 상실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성민이를 되찾는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11년 동안 ‘성민이 아빠’ 외의 모든 이름을 지우며, 모든 일상의 가치들을 유보하고, 오로지 성민이의 귀환만을 위해 절실히 노력해왔다. 망가진 일상, 가난의 늪, 조현병에 걸린 미라, 이 모든 것에서 윤석을 지탱해온 것은 상실을 메울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성민이는 행복과 함께 돌아올 것임을 윤석은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온 성민은 행복의 전조가 되지 못한다. 성민이는 종혁이라는 이름으로 11년 간 유괴범의 유복한 양육 아래에서 성장했다. 유전자 검사로는 90% 이상 일치한다고 했으나, 심적으로 성민에게 윤석은 아빠가 아니고, 미라는 엄마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윤석과 미라에게도 성민은 아들로 온전히 느껴지지 않는다. 성민은 오로지 자신을 키워온 유괴범만을 그리며, 돌아온 집에 혐오를 느끼고, 윤석은 마치 그가 성민을 ‘유괴한 것’과 같은 심사까지 느낀다. 아이의 귀환으로, 상실의 아픔을 없앴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윤석의 현실은 암흑 속이다. 아니, 그 전보다 더 짙은 암흑 속에 갇혀있다.


 
회복불가능성

 
어떻게 상실을 회복해 나갈 것인가.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회복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아이를 잃어버렸던 사건과, 아이를 잃은 채 살았던 11년은 아이가 돌아온다고 해서 회복할 수 없다. 상실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의 괴리는 좁힐 수 없으며, 아무 생각 없이 ‘모토로라를 구경하고’, ‘클렌징크림을 사던’ 11년 전의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암흑이 드리운 자리를 영원히 채우지 못한다면, 그 암흑을 견뎌낼 수밖에. 아내 미라가 죽고, 성민은 경찰서에 드나들며 윤석을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래도 현실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는 오른손을 내밀어 아이의 작은 손을 쥐었다. 아이는 문득 울음을 그치고는 그를 말똥말똥 올려다보았다. 그는 왼손도 마저 내밀어 아이의 오른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이가 간지러운 듯 발을 꼼지락거리며 좋아했다. 아이의 양손을 놓지 않은 채 그는 오래도록 평상 위에 앉아 그에게 찾아온 작은 생명을 응시했다.
(p.84)


성민을 상실한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 존재하지도 않았을, 상실에서부터 연쇄하여 태어난 성민의 아이. 이 아이의 양손을 꼭 잡는 윤석은 마치 수십 년 전 성민을 잡지 못했던 손의 공허함을 채우려는듯하다. 상실의 연쇄로 태어난 손자를 키우며, 윤석은 상실 이후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상실 이후의 삶은 상실보다 더 잔인하다.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명징한 울림이 아니라, 상실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는 잔인하리만치 냉정한 통찰을 보여준다. 상실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상실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것 뿐, 그 상실은 다시 메울 순 없다는 것이다. 이 ‘상실’에 어떤 것을 담을 지는 독자의 몫이겠다. 텍스트 그대로 잃어버렸던 아이를 담을 수도 있고, 자신이 지난 날 잃어버린 어떤 것을 담을 수도 있겠고, 많은 국민들에게 큰 상실감을 안긴 세월호 참사를 담을 수도 있겠다.
 
우리가 평소 ‘아이를 찾습니다’라는 문구를 보면서 느끼는 슬픔과는 분명 다른 결의 슬픔이다. 전자의 슬픔이 아이를 상실한 그 자체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공감하는 슬픔이라면, 소설 <아이를 찾습니다>가 보여주는 슬픔은 상실을 메울 수 없다는 허무와 절망에서 추동되는 슬픔이다. 상실을 메울 수 없이 상실 이후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성민이 아빠’들이 눈물겹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회복불가능성, 상실한 자에게 가장 잔인한 선고를 내린다.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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