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결국, 여성의 투쟁이라는 것은_트로이의 여인들

글 입력 2017.08.2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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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이 꺼진다. 가장 설레는 순간이다. 무대 뒤 왼편에 난 문으로 변사를 연상시키는 옷차림의 사내가 뚜벅, 뚜벅 걸어 들어온다. 트로이, 헬레네, 파리스, 그들에 관련된 신화를 간략하지만 익살스럽게 늘어놓는 그의 말솜씨에 사람들이 깔깔 웃는다. 하지만 분위기는 ‘트로이의 여인들’이 저벅, 저벅 걸어 들어오면서부터, 그들이 느릿, 느릿 몸을 굼벵이처럼 숙였다가 들어 올리면서부터, 완전히 반전된다. 무대는 순간 폐허로 변한 트로이가 되고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유령처럼 보인다. 바로 그 때, 그리스의 비극을 모티프로 한 이 연극에서 우리나라의 한스러움을 목격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망국의 여인들. 스산하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한 시간 내내 공연장을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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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 연극 화법, 군무, 집단적 레시타티브”


 <트로이의 여인들>은 그 어떤 연극보다도 연극적이었다. 70년대 흑백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할 만큼 공연은 매우 과장되어 있었다. 열세명의 여인들은 이젠 그들의 손을 벗어난 운명을 ‘어디로’를 외치고 또 외치며 궁금해 마지않았다. 그리스의 군사들은 그녀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마치 광대처럼 희극적으로 발표해댔다. 그 누구의 믿음도 얻지 못하는 아름다운 예언자이자 트로이의 공주 딸 카산드라는 신들린 몸짓과 눈빛, 춤사위로 보는 이까지 괴롭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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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여왕 헤베카와 그녀의 딸 카산드라

 
 극을 보는 동안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연극 <왕과나>가 떠올랐다. 알고 보니 두 연극 모두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작품이었다. 이들의 실험적이고 음악적인 시도들은 관객에게, 그리고 내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무언가를 현실에 가장 근접하게 보여주는 것 역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지만, 텍스트에 따라서는 오히려 연극답게, ‘극적으로’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 장희빈을 재해석한 <왕과나>와 그리스의 비극을 바탕으로 한 <트로이의 여인들>처럼 이미 충분히 재생산된 모티프의 경우, 극적인 화법을 활용하는 것은 자신만의 독창성을 드러내고 존재감을 굳건히 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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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베카의 며느리 안드로마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짓 담담하다”


 적극적인 표현 방식과는 달리, 트로이의 여인들은 여느 비련의 여주인공들과 달리 담담했다. 슬퍼 울부짖었으나 쓰러지진 않았다. 온몸으로 절망했으나 무너지진 않았다. 말 그대로, “선 채로 꾸짖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부여잡은 채, 얼핏 보면 별 모양 그릇에 동그란 빵을 끼워 넣은 것처럼 그 조합이 부적절해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극을 보면 그런 아이러니가 발휘하는 시너지 효과를 알 수 있다. 그토록 흔들리는데도 불구하고 제 자리에 발을 딛고 서있는 그들의 강인함을, 그래서 더 서늘하게 전해지는 여인들의 울분과 목소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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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여성의 투쟁이라는 것은”


 하지만 아쉬움을 감출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하는 도시를 잃고 가족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던 것으로 모자라 그들을 침탈한 그리스에 소모품으로 팔려나가는 신세가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은 칭찬하고 싶다. 헬레네의 치졸함을 꾸짖는 것도, 적군 앞에서 당당하게 그들의 잔인함을 비난한 것도 좋다.

 그러나, 뭔가 부족했다. 왜 헤카베는 자신의 며느리 안드로마케가 원수의 여자가 될 지경인데 손자를 위해 참고 견디라고 애걸복걸해야 했는가?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투쟁일까? 말로써 항의하는 것 이외에 그들이 다른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을까? 그것이 망한 도시의 신민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것일까, 여성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것일까? 그들은 인간다운 최후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과연 그들은 스스로가 인간답다고 느꼈을까? 극의 구조와 방식은 ‘현대화’했으나 그 내용은 과연 얼마나 ‘현대화’ 되었는가? 여러 가지 의문을 가득 안은 채 극장 밖을 잰걸음으로 빠져나왔다.

 그리스의 비극에서 신여성의 그림자를 뒤지는 내가 오히려 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트로이의 여인들>이 고전의 현대화를 넘어 인간과 여성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통찰력에 이르기를 바랄 뿐이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그럴 자격도, 능력도 이미 가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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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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