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nion] < 덩케르크 >, '승리'가 아닌 '생존' [영화]

글 입력 2017.08.15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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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이자 세계 2차대전에서 발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 <덩케르크>를 두 번 관람하였다. 평소 전쟁영화를 즐겨보지는 않아서 덩케르크가 좋은 평을 받는다고 해도 첫 관람 때는 반신반의 하는 마음이었지만, 여러 생각을 하게 해주는 인상깊은 영화였기 때문에 아이맥스로 재관람까지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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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가 아닌 생존

<덩케르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쟁을 ‘승리’가 아니라 ‘생존’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았다는 점이었다. <덩케르크>에서는 전쟁을 시작한 명분이라던가, 그것을 좌지우지하는 지도자들이 두뇌싸움을 다루지 않고, 전쟁에 참여하게 된, 전세의 큰 흐름에 매순간 휩쓸려가는 비교적 아주 낮은 위치의 병사들의 관점에서 전쟁을 담는다. 이 과정에서, 거시적인 명분싸움은 담기지 않는다. 모든 전쟁에서 그러하지만 특히 <덩케르크>의 배경인 제 2차 세계대전에서는 명분이 아주 중요했다. 나치와 파시즘에 대항하여 자유세계의 확산을 내세운 이 명분에 따라 여러 나라 연합군이 참전했다. 그러나 <덩케르크>에서는 주인공이 되는 일반 병사들이 명분에 열광하거나 전의를 다잡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내가 살고, 내 전우가, 우리가 살아 남는 것만이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항구에 들어온 병사들에게 빵을 나눠주며 ‘잘했네 젊은이’ 라고 말하는 노인에게 ‘그저 살아 돌아온 것뿐인데요’ 라고 대꾸하자, 노인이 ‘그거면 충분해’ 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병사들은 그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덩케르크에서 구조되어 온 병사들은 한껏 주눅이 들어있다. 자신들은 겨우 살아 돌아온 것일 뿐, 결론적으로 ‘조국’의 ‘승리’에 기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자격지심으로 환영 인파의 따듯한 인사도 비난과 비꼬는 어조로 오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그들의 환영이 진정한 칭찬과 격려였음을 깨닫는다.

노인의 말처럼, 살아 온 것만으로 그들은 잘한 것이다. 일반 시민, 일반 병사에게 사실 국가가 내세우는 민족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전쟁의 명분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장 배가 침몰하고 구조선에 내가 탈 수 없고, 나를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구조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 전쟁에서 조국이, 연합군이 승리해야 한다는 의지는 누구에게도 없었을 것이고, 있더라도 이 상황에서 전혀 중요치 않다. 그저 내가, 내 옆의 인간이, 살아야한다는 것 밖에는, 극한의 실존의 문제만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이다.

병사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관심사가 생존에 있다. 징발된 배를 직접 이끌고 구하려 나서는 선장도, 그 아들과 친구 조지도, 덩케르크 현장의 해군 육군 사령관도, 전투기를 모는 공군 병사도. 이들에게도 거시적인 의미에서의 승리는 염두에 없고, 당장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존에만 집중되어있다. 연합군의 승리와 상관 없이, 살아 돌아온 것 만으로 이들은 제 몫을 해낸 것이고, 이들은 누구를 더 죽여서가 아니라, 살아 돌아 왔기에 칭찬받을 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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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에서, 이들에게 ‘조국’과 ‘우리 편’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징발에 기꺼이 응한 선주들은 ‘조국의 승리에 기여한다’는 명분을 머릿속에 두고 나섰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이들의 ‘생존’에 기여하기 위해 나섰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전하는 사령관의 감사도 같은 맥락에서 이들을 살려주어 감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덩케르크의 구출 작전은 결과적으로 연합군의 승리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것인데 이것을 과장하여 연합군의 승리를 강조하기보다, 당면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비추었다는 점이 좋았다.

아쉬웠던 점은, 물론 영화에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자막에서 여러 장면에서 ‘home’이 ‘조국’이라고 번역된 부분이었다. 영화 말미에 징발된 선박들이 덩케르크로 몰려올 때에, 육군 장교가 해군 사령관에게 ‘무엇이 보이십니까?’ 라고 묻자, 해군 사령관이 ‘Home’ 이라고 대답한다. 이 ‘home’이 한국 자막에서 ‘조국’이라고 표시되었는데, 이는 적절한 번역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home’, 즉 그들의 집이 영국이고, 그들의 조국인 것은 분명하나, ‘조국’이라고 표현되는 것은 다소 정치적인 함의가 있는 말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국이’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기 보다는, 이제 살았다, 이제 집에 갈수 있다는 의미에서 ‘집이 보인다’는 의미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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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명분을 주입하려 하거나, 전쟁의 잔혹한 참상을 주목하여 교훈을 주려 하기 보다, 인간이 마주하는 여러 상황 중에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덩케르크>는 특별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실존인 생존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있어, 사실 ‘전쟁’이라는 것은 그것을 비추는 도구일 뿐, 다른 상황이 설정되었어도 그 본질적인 문제의식은 무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만큼 이 영화를 통해 본질을 가리는 여러 명분을 걷어내고 생존의 문제만을 조망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감상이었다.

 
[송세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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