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안의 ARTIST가 머리를 드러내기까지 [문학]

예술로 귀결되는 스티븐의 타고난 기질 분석
글 입력 2017.08.11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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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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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1916)에서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Stephen Dedalus)를 통해 예술가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그는 스티븐에게 다양한 예술가적 기질을 부여하는데, 이를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인지시키는 데 있어 “의식의 흐름”이나 ”에피파니”의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우선 스티븐은 아름다움(美)에 대해 꾸준한 집중과 갈망을 보인다. 가령 작품 초반 산수 시간에 아이들의 장미 배지를 보며 그는 순식간에 자신만의 사고에 빠져드는데, “하얀 장미와 붉은 장미를 생각하면 모두 아름다운 색깔들이었다”라며 산수 셈의 답을 찾는 것보다는 색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어린 그로부터 그가 남다른 미적 호기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지닌 이 성격을 바닷가 소녀와 마주하며 최고조로 끌어올리는데, 이 장면은 단순한 관심 정도를 넘는 주인공의 에피파니의 순간으로, 그가 갈망하던 미에 완벽히 부합하는 대상을 발견하고 극도의 흥분을 느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이스는 소녀를 넋을 잃고 바라보는 스티븐의 시선을 세밀하게 표현함으로써 진정한 아름다움을 깨닫는 그의 떨림을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한다.

이후 스티븐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의 이론을 적용하며 자신만의 미학을 정립하기에 이르는데, 린치와의 대화에서 그는 인간의 연민과 공포, 자극과 욕망 등을 언급하며 적합한 예술과 부적합한 예술의 차이를 설명하기까지 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스티븐에게 “미”란, 단순한 추구의 대상을 넘어 예술가의 길을 가는 데 있어 자신을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줄 기준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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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는 스티븐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를 인정하게 된다. 그는 더블린의 사창가를 드나들며 성적 욕구의 노예로 지내기도 했고, 이후 이를 회개하고자 종교에 심취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종교에 극심하게 탐닉한 후에야 스티븐은 예술의 세계가 그가 진정 추구해야 할 길임을 깨닫는다. 이같이 다른 분야에 있어 그 끝까지 취해본 경험과 충격이 부재했더라면 그 반동으로 제대로 바라보게 된 예술의 길이 지금 그가 보는 것과 같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만큼은 옳다고 여겼던 것들의 한계를 겪고 난 뒤에 선택한 길이기에 그는 지난 선명한 경험에 비추어 더욱 확실한 결정을 지을 수 있었고, 결국 작품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분명한 예술가 한 명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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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를 예술가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그가 예술에 헌신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유년 시절 그는 엄격한 가톨릭 집안과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예민하고 연약한 아이였고, 이는 클롱고우즈 우드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괴롭힘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스티븐의 이 같은 예민함은 이후 그가 예술에 대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갖는 관조적 태도로 발전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내재해 온 예술에 대한 본능은 그 안에 잠재되어 있다가 일련의 발전을 거쳐 더욱 강인해지며, 그가 타고난 길을 걸으면서 자신을 구속한다고 판단되는 장애물들을 서슴없이 버리게 한다.

그는 부정적 이미지를 발견한 뒤 종교를 버렸고,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을 떠났으며, 끝내는 조국인 아일랜드를 뒤로하며 자신을 더욱 자유로운 개인으로, 진정한 예술가로 고립시킨다. 그의 이 같은 “아웃사이더”의 측면은 작품에서 몇 차례 암시되는데, 어머니와의 키스를 놓고 자신을 놀리는 클로고우즈 우드학교의 아이들을 대하며 그는 속으로 그들이 원하는 대답에 의문을 가지며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스티븐은 또한 뒤이어 옮겨간 벨베데어 학교에서 신앙에 의심을 품은 채, 다른 아이들로부터의 괴리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로부터 가장 단적인 아웃사이더의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이를 부각하는 장면은 작품 끝의 데이빈과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아일랜드가 가장 중요하며 나라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예술가도 있을 수 있다”라는 데이빈에게 냉혹하고 난폭한 어조로 “아일랜드는 제 새끼를 잡아먹는 늙은 암퇘지”라는 충격적인 답변을 내뱉는다. 이는 국가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최후의 한계선을 그어놓은 데이빈과 예술이라는 최상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스티븐의 입장을 대비시키며 그의 예술가적 주제 의식을 인식하게 하는 장면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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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스티븐은 완전한 아웃사이더를 선언하며 조국 아일랜드를 떠난다. 비록 예술가의 길에 완전히 들어서는 데까지 갈팡질팡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자신에게선 어떤 결함도 찾지 않으려고 하는 데에선 다분히 자만심이 느껴지는 인물이지만 작품의 끝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건 어쭙잖은 풋내기가 아닌 자신만의 의지와 신념으로 확신에 찬, 예술가 스티븐 디덜러스다.

그가 바닷가 소녀와 도서관 층계에서 찾은 새의 이미지로부터 앞으로 그가 추구하는 길의 방향이 가늠되며, 그것이 어떤 것에도 억압받지 않는 태생 그대로의 자유로움인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작품의 기반이 되어 집필된 조이스의 『율리시스(Ulysses, 1922)』 중 스티븐이 다이달로스보다 이카루스에게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밀랍이 녹지 않은 이카루스의 날개를 달고 외부의 모든 간섭을 벗어나 무한한 예술의 세계를 탐닉하는 그를 또 한 번 상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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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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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승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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