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분홍, 한계를 실험하다 [시각예술]

데히라 유키노리 개인전 'PINK-WHY IS THE WORLD FULL OF PINK?'
글 입력 2017.08.05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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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분홍색은 연약하고 뚜렷하지 않은, 어딘가 묶여있는 색이었다. 난 자유롭고 강렬한 파란색을 좋아했다.
 
호기심이 생긴 건 대학교 1학년 때 P를 만나고서부터다. 유난히 흰 피부가 돋보였던 P는 연한 분홍색을 좋아했다. 분홍색 필통을 열어보면 몸통이 분홍색을 띠는 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분홍빛을 띄는 꽃만 보면 홀린 듯 카메라를 꺼냈다. P는 내 생일에 “너랑 잘 맞는 향기일 것 같다”며 ‘미라클(Miracle)’을 건넸다.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만큼 매력적인 분홍색이 담겨있었다.
 
P에게 “왜 분홍색을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열정적으로 ‘색’에 대한 애정을 보인 P에게서 어떤 대답을 듣게 될지 궁금했다. 하지만 P는 “그냥”이라는 다소 실망스러운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것도 잠시, ‘싫어하는 이유 말하긴 쉽지만 좋아하는 이유 말하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상은 달랐지만 P는 어쨌든 ‘사랑’을 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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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이런저런 사연이 담긴 ‘핑크(pink)'를 주제로 한 전시에 흥미가 가는 건 당연했다. 최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독특한 디자인으로 유명세를 치른 ’에브리데이몬데이‘로 향해 ’PINK: Why is the world full of pink?' 전시를 관람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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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문을 넘어서면 가파른 계단이 지하로 이어진다. 계단을 가운데에 두고 양옆으로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하얗게 칠해진 밝은 공간에 들어서니 감각이 무뎌졌다. 계단을 하나씩 밟아가며 내려 가다보니 ‘낯섦’에 도취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려간 지하 1층(혹은 지하 2층)에서 카운터에 서 있는 직원을 보자 갑자기 잠에서 깬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괜히 멋쩍어진 나는 갤러리로 가는 길을 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니 좁은 듯 넓은 분홍색 공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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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피규어 일러스트레이터 ‘데하라 유키노리’는 “핑크는 내 영혼”이라 말할 정도로 분홍색을 사랑한다. 그는 “핑크가 없다면 내 작업은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분홍색에 엄청난 지위를 부여한다. 불현 듯 P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홍 이불, 분홍 인형들이 가득한 분홍 침대를 보여주던 P의 가장 순수했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데하라는 내가 P를 생각하며 기대했던 모든 것들을 보란 듯이 파괴했다. 일종의 ‘겁’을 먹고 굳어있는 나를 조롱하듯 경쾌하고 발랄한 일본 노래가 흘러나왔다. 전시장 온갖 곳에서 귀엽지도 착해보이지도 않는 인물들이 자신의 욕망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본 전시의 주인공격인 ‘사토시 야마모토’와 ‘뇨타이 마사코’를 묘사하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사토시는 ‘항상 피로하지만 야한 망상을 할 때만은 건강한’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이고 뇨타이는 ‘자신의 박력 있는 몸에 당황하며’ 살고 있다. 보통이 아닌(uncommon) 비주얼에 압도된 것도 잠시, 그들의 솔직함은 중독성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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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규어가 등장할 때마다 적응이 쉽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손엔 푸른빛이 감도는 식칼을, 다른 한 손엔 초록빛 생생한 생선을 움켜쥐고 있는 ‘고양이 아줌마’를 봤을 때 어느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고양이’란 단어가 주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느낌은 데하라의 손을 거치며 몽땅 사라졌다. 성기, 젖가슴 등 보통 ‘은밀다’고 여겨지는 신체 부위들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 야하거나 부끄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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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아도 입이 벌어졌다. 데하라 이 사람,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 눈과 입 부분이 완전히 뚫려 있는 피규어가 얼핏 ‘귀엽게’ 느껴지는 내 모습에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신 차리자’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옆에 놓인 밥 모형 위엔 고기가 올려 있었다. 어두운 빨간빛을 띄는 고기는 도살장을 떠올리게 할 만큼 사실적이었다. 즐겁다는 듯 스케이트 위에서 웃고 있는 ‘똥’의 모습 역시... (3초 정도는 악취가 났던 것 같다)

모든 작품엔 어떤 식으로든 분홍색이 들어가 있다. ‘이 피규어엔 분홍색 칠하는 걸 까먹었나?‘라는 생각에 자세히 보면 툭 튀어나온 유두가 선명한 분홍색을 뽐내고 있다. P가 내게 선사한 아름답고 다정한 ’분홍 세계‘가 완전히 박살나는 시간이었다. 신기하게도 분홍색에 대한 관심은 전보다 훨씬 커졌다.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는 말이 하나 틀린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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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이다.
그렇지만 한번쯤은 ‘분홍분홍’해지는 게 생각만큼 나쁘진 않을수도...





* 전시 정보 *

전시명 : 데하라 유키노리 개인전

전시일정: 7월 8일(토)- 9월 10일(일)
12:00-8:00PM
(월요일 휴관)

장소: 에브리데이몬데이 갤러리
(송파구 송파대로48길 14)

+ 전시 관련 굿즈는 카페에서 구입 가능


[이형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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