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그 중심엔 인간답기를 원하는 여인들이 있었다.

글 입력 2017.08.02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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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나는 벤쿠버에 있다. 7월 한 달 간 벤쿠버 섬이라 불리는 빅토리아에서 어학 프로그램에 참가한 뒤 6일 가량 벤쿠버를 여행 중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볼거리가 많지 않아서 유유자적, 한가하게 도심을 거닐고, 아늑한 카페를 찾아다니고, 음악을 듣는다. 아마 이 프리뷰가 아트인사이트에 올라가면 나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가는 중일 것이다. 유럽에 이어 두 번째 장기 체류, 그 끝자락에서 그리스의 여인들2 <트로이의 여인들>의 시놉시스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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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전쟁으로 피폐해진 도시에
시체들과 함께 남겨진 트로이의 여인들.
 그들은 유린을 당한 채 노예로 전락한다.

 트로이의 왕비 헤카베는 오디세우스의 종이 되고,
그녀의 딸 카산드라는 강간을 당한 채
아가멤논의 침실로 불려들어간다.

 또 아킬레우스의 사랑을 받은 포리크세네는
무참히 살해되어 아킬레우스의 무덤에 버려지고,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는
원수 네오프톨레모스의 여자가 되어야 할 운명.
그녀의 갓난 아들은 그리스의 군에 의해 절벽에 던져진다.

참혹한 비극 속에 던져진 트로이의 여인들은 그럼에도,
 그리스군의 잔학상을 비판하면서 인간다운 최후를 준비한다.





유린, 노예, 강간, 그리고 여자

 이번에 참여했던 어학 프로그램에는 한국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그 외에도 멕시코, 브라질, 체코, 벨기에, 일본, 대만, 홍콩 등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다. 모두를 알지는 못하지만 일주일 내내 같이 먹고 자고 공부하다보니 얼굴은 대충 눈에 익었던 것 같다. 그 중엔 이목구비가 꽤나 뚜렷한, 에콰도르에서 온 유일한 남자 하나가 있었다. 나중에서야 그가 극심한 인종 차별주의자이자 여성 혐오가 극심한 인물이라는 걸 알았다. 특히 동양 여성에 대해. 여기에 직접 언급하긴 그렇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그런 것들 있지 않은가. ‘동양 여성은 외국인이면 다 좋아 한다‘ 같은 선입견. 한국인들이 자신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맹점을 이용해 그는 같은 반 한국인 여자를 코앞에 두고 그녀의 머리맡에다 추악한 말들을 내뱉었다는 것이다. 그 얘길 듣고 난 후부터 나는 자연히 그를 피해 다녔다. 그의 시야를 벗어나 말하고 행동했다. 대화를 나누고, 운동을 하고, 춤을 추는 내 모습을 두고 무어라 떠들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동양인, 특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모욕적인 언행을 참아내야 하는 일이. 비슷한 일을 한두 번 겪고 나서부터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 순전히 웃음이 많은 사람일 수도 있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와 같은 지극히 정상적인 대화일수도 있는데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경계한다. 내가 과민반응 하는 걸까? 혹자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스스로가 부여하지 않은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 않다. 이것은 좋고 나쁨, 혹은 과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닌 옳고 그름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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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운 최후


 글을 빠르게 훑어 내려가던 눈동자가 오랫동안 머문다. 인간이라는 단어를 물끄러미 더듬어 본다. 그리스의 비극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유린에 대해, 치욕스러움에 대해서는 안다. 물론 나는 도시가 함락되지도, 조국이 타자에 의해 점령당하지도 않은,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사는 평범한 여대생이다. 하지만 순전히 살아갈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간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음에도 나는 종종 인간답지 못하다고 느끼며,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친구를, 가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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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세희 작가는 자신의 저서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200쇄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200쇄 출간은 부끄러운 기록”이라고 말했다. 억압의 시대를 기록한 이 소설이 아직도 이 땅에서 읽혀지는 것은 30여 년 전의 불행이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어떤 시대극은 원하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과거로 남지 못하기도 한다. <트로이의 여인>은 현대적으로 각색된 작품인 동시에 그리스 비극의 연장선상에서 놓여있다. 그리고 그 연속성의 기저에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여성이 자리 잡고 있다. 다행인 것은 늘 주변부를 멤돌던 타자로서의 여성이 이제는 중심으로 그 자리를 옮겨왓다는 것.

 트로이의 여인들은 인간다운 최후를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그들은 나만큼 용감할까, 나보다 용감할까. 여성의 비극을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역사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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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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