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ject 당신 ] 01. 아마도 저는 미련이 많은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반채은

글 입력 2017.07.3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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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當身)

1. 듣는 이를 가리키는 이인칭 대명사
2. 문어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



"아마도 저는 미련이 많은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편지를 받았다. 아니, 사실 어느 인터뷰이의 답신이다. 자기소개로 시작하는 이 답신은 아트인사이트 독자를 염두에 둔 수다스러운 대답이었다가도, 어떤 문장에 다다르자 완결된 글이 되어버리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게 마치 꼭 편지 같았다. 처음을 어떻게 써내려 가야할지 몰라 횡설수설거리다가 순식간에 뭉근한 열기가 글 전체에 일관되게 퍼져 흐르는 따뜻한 편지 말이다.
  
  당신의 이름은 ‘반채은’. 에세이 <보암보암>을 연재하다 현재는 휴재 중이다. 나는 캐나다에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당신의 사정에 따라 서면으로 몇 마디 나누는 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딱 한번 아트인사이트 공식 일정으로 대면한 적 있었고 이따금 개인 SNS로나 서로의 소식을 구독하듯 들여다 본 사이인데, 기다렸던 질문이라도 받은 듯 반갑게 대해주는 모습에서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새삼 다시 마음이 녹는 경험을 했다. 당신은 따뜻하다. 정말 따뜻하다. 나는 따뜻한 사람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는 버릇이 있다. 무너질 정도로. 시종일관 ‘세상 원래 다 그런 거잖아. 그게 뭐 별거라고.’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리기 좋아하는 내가 완전히 무장해제 되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당신: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느껴왔던, 혹은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의 원천이에요.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어도 되는 건가? 영원을 위한 자리가 사라진지 오래인 세상인데. 스쳐가는 모든 사람에 대해 ‘감정’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준다는 건가? 그럼 가슴 속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을 텐데? 얼마나 마음이 넓어야 하는 거지? 잊고 싶을 정도로 불쾌한 기억은 대체 어떻게 다루는 사람인거지? 혼란스러운 내 눈앞으로 몇 줄의 문장이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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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언젠가 글로 쓰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한데 저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의 내용이에요. 햇빛이 좋은 날에는 목적 없이 걷기를 즐기는데, 그냥 걷다가도 문득문득 뒤를 돌아보곤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 걸어갈 때와는 다른 길이 내 뒤에 남겨져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같은 길이라도 그것 뒤로 펼쳐지는 배경이 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처음 눈앞에 보이는 곳으로 걸어가서 제가 원래 서있던 그곳을 바라보는 게 괜히 좋습니다. 그래서 제 핸드폰에는 앞에 놓인 길보다 뒤로 이어진 길을 찍은 사진들이 저장되어있어요. 아마도 저는 미련이 많은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련’이라는 단어 앞에서, 나는 괜스레 당신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다. 당신 곁에는 당신의 휘청거리는 뜨거운 눈빛을 지탱해줄 사람들이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구나.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만큼이나 수명이 긴 감정들을 전부 놓지 못할 정도로, 다 안아야 할 정도로, 강하고 싶었던 거구나.


“자기 자신을 색깔로 표현해 본다면 어떨까요?”

당신: 저는 제 자신이 바다처럼 파랗게 털털하고 활발하다가도 하얀 백지장처럼 차분해지곤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늘색’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한편으로는 하늘을 올려다보기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넓은 하늘이 저를 집어 삼킬 것만 같거든요. 하지만 하늘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늘만큼 세상 모든 것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누구도 하늘을 독점할 수 없지만 누구도 하늘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이 되고자 하는 거, 아마 저는 스스로를 하늘색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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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언컨대, 당신~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로 끝나는 무력함의 표현을 애정 하는 사람일 것이다. 애증일 수도 있겠지만, 증오보다는 그보다 더 깊은 사랑을 뿌리치지 못하는 쪽일 거라 믿는다. 미처 다 감싸 안지 못한 것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음으로써, 당신의 변두리에라도 자리를 내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 고백하자면 그런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내게도 몇 있는데 이상하게 나는 잘 버티다가도, 시건방진 생각이 들다가도, 그들이 울고 있는 볕이 멀리서 보이면 그 곁으로 가 같이 울고 싶어지곤 한다. 

  그리고 아무래도 당신에게서는 그 사랑스런 슬픔을 마주하는 곳이 ‘혜화’인 듯하다. 다음 인터뷰이에게 하고 싶은 말 혹은 하고 싶은 질문을 하는 <질문릴레이>에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싶을 때, 우울할 때 어디를 가시나요?’라고 묻고 스스로는 혜화라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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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저 같은 경우는 혜화를 갑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서울 구경을 와서 갔던 곳이 대학로였어요. 그곳의 분위기를 잊지 못합니다. 분명 복잡하고 붐비는데 한편으로는 아늑한. 예술을 하는 이들의 열정으로 버거운 혜화를 전 지금도 좋아합니다. 낙산 공원 산책로에 있는 작은 정자에 올라가면 전망대까지 가지 않아도 서울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와요.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기분이 좀 나아집니다. 서울 생활에 지치고 짜증나고 힘이 들다가도 그곳에만 가면 다시 서울이 좋아진다고나 할까요. 문득 다른 분들은 어떤 장소를 찾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제 다음 분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시면 그 곳에도 꼭 가보고 싶네요. 


  끝으로, 캐나다 빅토리아를 뜨겁게 담고 있는 당신 시선들을 올린다. 따뜻한 색감의 빛들이 자유롭게 유영하는 예쁜 사진들을 받고 선물 받은 듯 기분이 좋았다. 우리 인터뷰팀이 준비한 다양한 질문들과 다채로운 답신들의 전문을 모조리 올리고 싶지만 그 많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다 옮기기보다는 내 멋대로 이쪽을 택한다. 인터뷰어로서 불친절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암보암>을 직접 읽어보는 것보다 나은 건 없을 테다. 실체가 아니더라도, ‘보암보암’(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으로라도 다가서려 섬세하게 깜박이는 누군가의 눈짓을 보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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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insight 에세이 '보암보암' 연재 게시판 >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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