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는 건

오늘은 잘 모르겠어,
글 입력 2017.07.30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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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한다는 건
오늘은 잘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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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있다 당신이 있다 나는 당신의 머리칼에서 마른 나뭇잎을 떼어준 적이 있었다 당신에게 새 이름을 지어준 적도 있었다 지은 그 이름을 잊었지만 나는 당신이 눈앞에 없을 때 허공에서 당신의 얼굴을 골라냈다 그것은 너무 쉬웠다 나는 당신 없는 허공을 당신으로 채워 넣는 청동 시계를 눈동자 안에 지니고 있었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당신과 사랑을 했다

축복은 무엇일까 당신이 나를 부를 때 생기는 귓속의 부드러운 압력일까 내 주위에 언제나 나를 좋아하는 바람이 분다는 것일까 당신은 나의 축복일까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나는 당신을 소유한 적이 없다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 「축복은 무엇일까」 부분



몸 안에 어렴풋하게 흩어져 있는 것들을 모아 놓으면 아마 잔뜩일 거다. 다만, 어렴풋하고 흩어 있는 걸 모으는 데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해보겠다는 엄두가 나질 않았다.

사랑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의 계명을 실천하기라도 하듯 꼭 티를 낸다. 티가 난다. 그들은 마치 그 몸 안에 가득 차도록 출렁거리는 사랑을 어떻게 잘 담아낼 수 있는지 모르는 거처럼 어쩔 수 없이 흘러넘치고만 사랑들을 곳곳에 띄어놓고 산다. 그건 손길이나 시선이나 입꼬리나 잠을 자는 모습 같은 곳에서 드러난다. 그들을 빗기고 시선을 되돌리고 아무 소리도 듣지 않으면 수월하게 하루를 지낼 수 있지만, 나의 이야기들은 도무지 시선을 되돌리거나 아무 소리도 듣지 않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그래, 그런 까닭 없음으로 결국에는 이야기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들어야만 한다.

이야기는 하나, 둘 모인다. 몸 안에서 넓게 부유하기도 하고 차오르거나 마르기도 하면서, 아무튼 흔적을 남기면서 몸 안을 돌아다닌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잔뜩 모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믿기에는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고, 그렇다고 이야기 하지 않음으로 그들을 죽일 수도 없어서. 이런 마음이 꼭 사랑‘하는’ 사람의 안달 난 모습 같다고 느끼며, 이야기들이 모이는 것이, 그리고 이야기함으로 그들을 살려내야만 함이, 모두 까닭 없다고 느끼며 슬며시 사랑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듣는 것, 보는 것, 다시 되풀이 하는 것. 등등의 것들 앞에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마는 것. 나는 이 무기력함을 아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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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하는 오해는 ‘내가 너(대상)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라고 생각 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를 알랭드 보통은 낭만적 운명론으로 풀어낸다.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알랭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



나의 필연은 ‘너’라기 보다는 ‘사랑’이었다고 하는 편이 우리의 운명론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깨닫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나의 필연이 너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작고 편협한지 깨닫는 데에도. 나에게는 사랑할 필연이 있고 필연이라는 단어에서 짚고 넘어가듯 그건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나는 사랑을 하고, 바로 나의 그러한 사랑을 받는 것은 ‘너’이다. 이런 필연성을 레비나스는 피해의 유혹을 부추기는 것, 발가벗은 얼굴로 차마 죽일 수도 없는 것이라 하였으며, 비슷한 맥락에서 알랭 바디우는 세계를 구축하는 것, 즉 생존본능이라는 단어를 가져왔다. 그들 모두 사랑 앞의 무기력함과 그 강제를 말한다.

사랑 앞에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또 사랑은 얼마나 나의 우위의 것인지. 사랑하는 우리는 너의 부름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고, 너를 잊을 수도 없으며, 네가 겪는 불행들에 책임을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알랭필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부분 변주)


‘너’(타자)는 내게로 성큼성큼 거리를 줄이고 까마득한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어떤 형태나 특정한 방식 없이, 단지 압도하는 힘으로 내게 강제를 실천할 뿐이다. 너는 장소 없음, 아토포스, 나의 언어를 흔들어 너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모든 수식어는 틀리고, 고통스럽고, 서투르고, 민망하다.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인용)

시인들은 서로의 관계 없음을 노래하고, 오늘의 불확실성을 시인한다. 그들은 어색한 채로, 모르는 채로 나름의 장소를 만들고 문법을 구축하겠지만,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구축된 나름의 세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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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시. 다시 읽을래, 다시.)

당신이 있다 당신이 있다 나는 당신의 머리칼에서 마른 나뭇잎을 떼어준 적이 있었다 당신에게 새 이름을 지어준 적도 있었다 지은 그 이름을 잊었지만 나는 당신이 눈앞에 없을 때 허공에서 당신의 얼굴을 골라냈다 그것은 너무 쉬웠다 나는 당신 없는 허공을 당신으로 채워 넣는 청동 시계를 눈동자 안에 지니고 있었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당신과 사랑을 했다

축복은 무엇일까 당신이 나를 부를 때 생기는 귓속의 부드러운 압력일까 내 주위에 언제나 나를 좋아하는 바람이 분다는 것일까 당신은 나의 축복일까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나는 당신을 소유한 적이 없다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 「축복은 무엇일까」 부분



당신은 어디에 있을까. 죽지 않기 위해 당신과 사랑을 했다는 그의 고백은. 당신은 나의 축복일까, 고통일까. 우린 알 수 없다. 나는 당신을 소유한 적이 없기 때문에. 역시, 오늘은 잘 모르겠다고 털어놓는 수밖에.



*



사랑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난 이야기들의 수많은 문법과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하겠지만, 이유 없음을 이유 삼아 다음 이야기 앞에 나를 세워둔다.




(그림, 에드워드 호퍼)


[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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