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문득 기억나는 시구, 영화 올드보이 [영화]

글 입력 2017.08.01 12:12
댓글 3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웃어라.jpg
영화 올드보이



Laugh, and the world laughs with you.
Weep, and you weep alone

-Solitude, Ella Wheeler Wilcox



고3 시절, 영어 선생님께서 영시 해석을 해서 A4에 제출하라고 하셨다. 공부보단 재미있어서, 열심히 했다.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고독이 그렇게 나쁜 건가, 하고 궁금해 했던 기억만 있다. 어떠한 것도 명확하지 않았던 십대라, 자신을 둘러싸 싫기만 했던 상황이 고독이라는 것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사람의 기억은 이상하다. 적어도 13년은 묵었을 내 유치원 시절 기억은 아직도 조금 남아 있는데, 유치원은 지금 쓰레기장이 되어 있다.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2층 유치원에는 불이 켜진다. 이렇게 유치원에 대한 내 기억은 변하지 않은 채 쌓인다. ‘잃어버린다’라는 말과 ‘잊어버린다’라는 말을 구분하는 것은 이 때문일까. 쌓인 그 감정을 잊어버릴 수는 있어도 잃어버릴 수는 없으니까. 그것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순간 문득 얼굴을 드러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사실일 뿐이다.

세상에 한 명 혼자서만 오롯이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은 기존의 모든 것을 무너트린다. 이 때 이 사람은 어떡해야 하나.

복수해야 할까, 잃어버려야 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나?

오대수처럼 그 새끼를 죽이자고 달려드면 기분이 나아지나. 이우진처럼 남탓이나 해 볼까. 아니면 마지막 장면처럼 잃어버리려고 하면 기분이 괜찮아지나. 이렇게 글로 남기고, 영화를 찍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까. 또는 자살은 어때. 따뜻한 몸이 싫을 때가 있잖아. 사람은 누구나 죽어. 우리는 왜 이렇게 외로울까.

터미널에서, 어떤 사람이 길을 묻자고 다가왔다. 그 사람은 흔한 지리를 물었다. 그리고 진리를 말하려 했다. 내 얼굴이 이런 데에서 귀하며 이 것은 조상의 은덕 덕분이다. 그리고 좀만 더 빌어 준다면 내 앞길을 막고 있는 조상을 잘 보내드릴 수 있다. 나는 그 도깨비 같은 눈과 입이 내가 그리워하던 사람 같아서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진리를 말하려 하는 그 입이 그리웠었지. 웃을 때도 잘 감지 않던 도룩대는 눈도 닮았네. 그 눈으로 나를 훑었지. 욕망하는 눈으로. 나는 그 욕망이 두려워서 최면을 걸었어. 나는 너를 사랑할 거라고. 그리고 그 최면은 적절했다. 이 때 나는 어떡해야 하나.

복수해야 할까, 잃어버려야 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나?

앞의 나는 고지식한 소리 하겠지. 잃어버리는 건 없어. 잊을 뿐이야. 하지만 이야기를 내 마음대로 믿어버리는 것은 어떤가. 내 안의 몬스터를 밖으로 끄집어 내서 걸어가게 만들어 버리면, 그 후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끝내면, 죽기 전까지 그 사실 여부를 연기할 수 있으니. 마치 최면처럼. 흘러나오는 시구를 따라서.


올드보이 마지막 장면 1.jpg
ⓒ 쇼이스트

올드보이 마지막 장면 3.jpg
ⓒ 쇼이스트


성채윤.jpg
 

[성채윤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3
  •  
  • aa0aa
    • 안녕하세요, 이번 두레에 참가한 이정민입니다.
      저도 이 영화를 참 흥미롭게 봤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시로 시작하는 이 글은 문장들이 시적으로 느껴져서 마치 하나의 산문시를 읽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특히나 ‘터미널에서-’ 로 시작하는 문단은 마치 <올드보이>를 간추려 놓은 시 같아서 참 좋았습니다.)
      잃어버린다는 것과 잊어버린다는 것에 대한 부분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사전적 정의만 알 뿐 그리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내 기억에서의 둘에 차이에 대해 많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기억이나 감정을 잃어버린다면 참 서글플 것 같습니다. 문득 영화 <이터널 선샤인>도 생각이 나고요.
      글 마지막은 <올드보이>의 마지막 장면이 장식하고 있습니다. 최민식의 이 공허한 웃음은 볼 때마다 쉽지 않네요. ‘복수해야 할까, 잃어버려야 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나?’ 저는 글을 읽으면서 이것이 마치 마지막 장면에서 최민식의 생각 같다고 느꼈습니다. 복수할 유지태가 죽어버렸으니 기억을 잃어버려야 할까, 혹은 유지태가 그의 누나에 대해 말 한 것처럼 ‘다 알면서도 사랑’해야 할까, 이내 어려워져 생각을 정리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1 0
  •  
  • chorus525
    • 안녕하세요 이번에 두레에 참여하게 된 나정선 입니다.
      우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올드보이는 너무나도 유명한 영화라서 다양한 리뷰나 비평을 읽어봤지만 이렇게 시구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아요. 위에서 정민 님이 말씀해 주신 산문시와 같은 느낌처럼 저도 글 전체가 시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번 읽어 보게 된 것 같아요^^;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니 신선한 글 이 나오게 된 것 같네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1 0
  •  
  • 자유인
    • 안녕하세요 두레에 참가한 최지은입니다.
      올드보이 정말 인상깊게 봤습니다. 영화, 하나의 문구에서 이렇게 많은 스토리와 생각들이 파생되어 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다와 잊어버린다에 관한 생각이 좋았습니다. 잊어버릴 수는 있어도 잃을 수는 없다. 과거의 기억은 영원히 그대로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만 너무 많은 생각들을 함축시켜 표현하셔서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읽어봤습니다 :) 오히려 많은 것을 짧게 담아서 시를 보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 1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