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피해자와 피해자인 흑인과 백인 [문학]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고...
글 입력 2017.07.22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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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왜 그들이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는지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었다. 사실 어려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가장 큰 감정이다. 어쩌면, 편집된 학문에 빠져있던 내 책임이었다. 고백하자면, 이 책의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 동안 살면서 들어보지 못했던, 이해하기 어려운 어휘들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운데 가슴이 아렸다. 그들이 흑인만이 아닌 우리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postcolonialism’은 대체 무엇일까? 왜 흑인은 자신을 백인에 동일시하고 싶어 했을까? 등의 많은 궁금증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 공포와 열등 콤플렉스와 전율과 굴욕과 절망과 자기비하에 교묘히 세뇌당한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라는 에이미 세자르의 말은 이 책을 가장 잘 설명 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탈식민지라는 것도 식민 시대를 겪었던 나라와 그 나라의 인종에 대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파농은 말한다. 흑인은 백인이 되기를 원한다고. 또한, 흑인에게는 흑인성이 있고 백인에게는 백인성이 있다고. 이런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이 책을 끌고 나가고 있다. 무엇이 흑인성이고 왜 그 흑인성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반대로 왜 백인은 우월성을 가지게 됐는지 파농은 이 책에서 분석한다. 나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의 베이스가 되는 흑인과 백인, 이 두 인종간의 논리를 통해 이 책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프란츠 파농은 1925년 서인도 제도의 한 섬인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마르티니크를 포함한 일련의 섬들로 구성된 앙띨레스의 흑인들을 심리적으로 분석한 글이다. 제목은 파농을 포함한 앙띨레스에 거주하는 흑인들의 심리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다. 그들은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이면서 다른 흑인과 구별되는 그래서 백인과 같은 존재로 스스로를 인정한다. 파농은 바로 이러한 흑인들의 의식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를 언어와 섹스 그리고 흑인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것의 정신 병리학적 원천을 이해하고자 했다.

 아프리카 흑인이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신대륙에 끌려왔을 때 그들은 그들의 조직이나 언어, 가족구조와 종교 등 모든 토착문화를 조직적으로 박탈당했다. 프랑스에 일꾼으로 끌려온 그들이 불어를 배우기를 강요당하거나 착취당하는 모습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부서진 삶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화를 수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백인들은 매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문화에의 접근을 허용했다. 지배문화로의 완전한 동화는 백인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방해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흑인역사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들은 항상 자신이 사는 넓은 지역사회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그곳에서 소외당하는 모순 속에 살아왔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결국 백인으로의 동화를 바라거나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민족주의라는 두 틀을 형성해 주었다.

 “불어를 매우 서투르게 구사하는 러시아인들과 독일인들을 나는 길거리에서 자주 만난다. 손발을 동원해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가르쳐 주고 나면 나는 묘한 감회에 빠진다. 저들은 어떤 나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의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구나, 라는 감회 말이다. 그들은 아마 자기 조국에서 변호사 일을 하거나 기술자 일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내게는 외국인이지만, 그들의 입장은 우리 흑인들과는 참 많이 다르다. 흑인의 경우 이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흑인은 문화도 없고, 문명도 없으며, 시쳇말로 ‘장구한 역사적 과거’도 없으므로.” 이 부분에서 파농은 불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만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모국어를 들으며 자신에게는 과연 저런 모국어가 있나 하는 생각에 빠진 것이다. 이 책에서 뿐 아니라 누구나 알듯이 언어라는 것이 사회적 속성을 강하게 갖고 있는 소통 도구이다. 파농은 앙띨레스 흑인이 프랑스를 경험한 후 그들의 언어에 어떤 변화가 오는지 검토한다. 그들은 더 이상 앙띨레스의 흑인이 사용하는 불어와 모국어의 결합인 피진을 쓰지 않고 프랑스 본토의 불어를 사용한다. 이는 불어를 문명화된 언어로 피진을 미개한 언어로 인식하는 자들의 무의식이 그대로 주입된 결과이다. 그들은 이제 불어로 생각하고 식민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백인이 되고자 한다. 이것은 공간적 일탈의지와 남달라 보이고 싶어 하는 차별의식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백인이 되고자 하는 앙띨레스 흑인들은 언어라는 문화적 도구를 보다 완벽하게 지배함으로써 보다 백인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흑인(앙띨레스)여성과 남성은 백인 남성, 여성과의 사랑 속에서 어떠한 의식을 가지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관계(백인남성, 여성과의 연인사이)를 자신이 어떻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정받으며 변화를 시도하고자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나는 마르티니크 여자입니다>에 나오는 흑인 여성인 마요테나 르네 마랭의 소설에 나오는 흑인 남성인 장 브뇌즈 둘 다의 의식의 심연에는 ‘열등감’이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무조건 백인 남성과 결혼해 스스로 백인의 지위를 차지하려는 여성이나, 자기 자신이 흑인이라는 생각 때문에 백인 여성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흑인 남성에게 순수하게 획득될 수 있는 사랑의 범주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리는 열등감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흑인들을 흑인이 아니게 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에 있지 않고 백인들의 승인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흑인 여성과 남성의 일반화로 이해하는 것을 파농은 경계한다. 자칫 이것이 서로의 이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파농은 언어와 성 정체성에 이어 자신들의 흑인성을 찾고자 한다. “아, 이 부끄러움, 수치, 자기 경멸, 그리고 오역질.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너의 피부색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 피부색’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끔찍한 순환론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말이 바로 흑인들의 흑인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파농은 이제 마노니의 <프로페로와 칼리반 : 식민주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통해 식민주의가 백인 자신들의 불만감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식민주의를 단순히 심리학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열등 콤플렉스만을 강조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흑인에게 있어 열등 콤플렉스는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에서 문명인과 원주민과의 만남에서 만들어낸 인종차별이 있는 사회인 식민주의의 탄생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파농은 이를 정치경제적 측면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말라가시 사람들의 의존 콤플렉스는 그 섬에 출현한 백인 식민주의자들부터 비롯한 것처럼.

 식민지 사람들이 이처럼 열등의식 속에서 정신적으로 침몰해가는 한편, 백인 역시 우월의식에 빠져 현실에서 유리된다. 자신들이 대하는 식민지인이 표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교육받은 지식인일지라도 상대방의 지성을 인정하지 알고 계속 어린아이를 대하듯 피진어를 사용한다거나 식민지인들이 자신들보다 우월한 지성을 드러내면 교육시켜 준 은혜로운 사람들에 대한 배은망덕한 것들로 치부하는 등, 유럽의 백인들은 식민지인들을 '동물, 야만인, 어린아이 수준의 인간' 이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흑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으려는 그들의 고집은 현실을 외면하는 오류를 낳는다. 그러므로 파농은 "백인은 백인성에 갇혀있고, 흑인은 흑인성에 갇혀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백인과 흑인의 만남, 문명화 전략이라는 미명하의 식민주의로부터 나온 흑인에 대한 속성에 대한 이해는 흑인성이라는 이름으로 흑인과 백인에게 각인되었다. 흑인성은 아프리카의 북, 식인 행위, 지적 결핍, 우상 숭배, 인종적 결함, 노예선 등으로 나타난다. 흑인성은 저자인 파농의 자서전적 이야기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가 앙띨레스의 흑인으로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의사로서 활동하면서 느낀 것이기도 하다. 흑인성은 흑인이 단지 현재의 상황에 따라 인식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선험적 역사를 가진 존재로 인식됨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에 이르면 파농은 이런 흑인성을 가진 흑인들에 대해 정신 병리학적 차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나는 흑인이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이다. 집에 있으면 내 어머니는 나를 위해 불어로 된 연가를 불러주신다. 흑인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들어있지 않은 연가를 말이다. 내가 반항의 기색을 보이거나 시끄럽게 굴면, 이내 ‘제발 검둥이처럼 굴지 마라’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좀 더 자라게 되면 나는 백인의 책을 읽게 된다. 그로 인해 야금야금 유럽으로부터 내게 건너온 백인의 편견, 신화 그리고 민속 등을 내 자신의 가슴 속에 심게 된다.” 파농은 흑인이 '흑인'임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백인과 접할 때임을 강조한다. 파농은 흑인이 같은 흑인을 대할 때와 백인을 대할 때 행동 양식이 틀려지는 것에 주목하면서 흑인은 백인을 대할 때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부정하고 백인들이 강요한 모습 즉 '어린아이, 동물, 야만인'의 이미지만을 떠안게 된다고 주장한다. 흑인이 '흑인'인 것은 유럽인 식민주의자들이 부를 축적하기 위해 식민지로 진출하면서 자신들의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흑인'의 이미지에 맞추는 것이므로 흑인들은 이런 열등의식, 소외현상, 그리고 특히 유럽인들이 적극 주장하는 원주민들의 의존 콤플렉스에서 탈피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정신착란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파농은 절규한다.

 파농은 이러한 현상들을 정신 병리학적 차원에서 경험, 즉 유아기적 경험을 토대로 가족과 개인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앙띨레스 흑인이 자신이 편입해야 될 백인 사회와 다른 흑인 가족을 버리고 백인사회 속에서의 삶을 통해 백인과의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해하고자 한다. 앙띨레스인은 이제 자신을 흑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흑인이 백인과 접촉할 때에는 어떤 민감한 행동을 수반하는데 그 과정에서 만약 흑인의 심리 구조가 취약하면 그의 자아는 붕괴되고 타자에 의해 가치를 부여받는 타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백인이 만들어낸 흑인 공포증은 생식기의 층위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백인의 성적 왜소증이 복수의 심리로 작동하여 흑인 남성의 생식기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백인은 흑인을 생물학적 존재이자 거의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이해한다. 백인에 의해 만들어진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흑인은 백인의 선입견과 욕망의 주춧돌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흑인에 대한 집단무의식은 고스란히 흑인들에게 이양되고 흑인들은 다시 타자로서 흑인에 대한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결론에 이르게 되면 파농은 헤겔을 통해 절대적인 상호성에 의한 타인을 통한 객관화로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의 합일이 가능함을 이야기한다. 아직 흑인들은 그들의 흑인성에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유색인종으로서의 나에겐 권리가 없다. 어떤 측면에서 나의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며 어떤 측면에서 열등한가라는 것을 알아야 할 권리가 말이다. 유색인종으로서의 나에겐 권리가 없다. 내 인종의 과거에 대한 죄의식의 결정체가 백인에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야 할 권리가 말이다. 유색인종으로서의 나에겐 내 과거의 주인인 백인의 자존심을 짓밟아야 할 권리도 없다. 백인에 의한 내 선조의 길들이기에 대해 보상을 요구할 권한도 의무도 없다. 흑인만의 의무, 백인만의 부담이라는 것은 없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나를 자꾸만 전쟁터로 내모는 세상, 절멸이냐 아니면 승리냐 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만이 남아 있는 세상에 말이다.” 하지만, 결코 양자택일에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양자택일이 아닌 양자 합일을 통한 결론에 도출해야 서로를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어느 주체의 일방적 행위는 무의미하며 쌍방의 매개와 인정을 통해 타자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농은 일방적 자유선언으로는 흑인이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갈등과 갈등이 내포되어 있는 문제를 통해 서로의 타자성을 회복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런 합일이 결코 쉽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파농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유럽 식민지 국가의 지배를 받은 식민지인들이 겪은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식민지인들이 자아를 부정하고 비존재의 상태에서 자신들을 타자의 시각으로 보는 정신분열 상태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자 한 것 같다. 이 때 식민지인들이 쓰고 있던 하얀 가면은 식민지인들이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출구로서 백인이 되고 싶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쓴 가면이었던 것이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의 백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목적에 맞게 만든 괴상한 가면을 흑인에게 씌워놓고 그 가면의 이미지가 흑인의 참 모습이라고 강요했다. 그러므로 파농이 이 책의 도입 부분에서 강조하듯이 흑인은 이 가면을 벗어던짐으로써 ‘흑인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 흑인도 백인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인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구의 장구한 역사를 통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혹은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는 항상 어느 곳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인간간의 관계였지만 백인과 흑인간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 선과 악의 관계,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존재와 비존재의 관계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었다. 또한 헤겔의 변증법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파농은 흑인이나 백인이나 소외 현상에서 해방되어 서로의 언어 소통의 길을 열도록 노력해야 하며, 흑인은 과감히 자신들의 인간성을 주장하고, 백인들에게도 인간적인 행동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해결책은 백인들을 죄 의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인은 제국주의 덕분에 부와 권력을 얻었지만, 그들 역시 우월 콤플렉스와 함께 흑인들을 억압했다는 죄의식으로 인한 정신 질환을 똑같이 앓고 있었다. 결국 식민주의는 백인과 흑인 ,양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이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며 모두 가해자인 상태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파농이 말한 합일이란 것도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 줄 때 자신들을 회복할 수 있는 미래의 한 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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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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