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도그지어 : 나의 침실로 [문화전반]

글 입력 2017.07.1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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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지어 : 책장의 한쪽 귀퉁이를 삼각형으로 접어놓는 일을 뜻한다. 순간을 기록하는 표시인 셈이다.





 나는 그를 기억한다. 그는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위태로운 사람이었다. 많이 웃고,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의 고독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만 그가 숨겨둔 것들을 보여주었다. 그의 외로움과 고통, 허망, 분노들. 그런 불건전한 것들을 내게만 보여주는 그를 보며 나는 조금의 설렘을 느꼈다. 어쩌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런 헛된 생각을 하며 그의 불온한 것들과 조우했다.
 
 문학이나 영화에서 계절은 긴 설명을 대신하는 함축적인 비유를 맡기도 한다. 예컨대 여름은 만남이나 재회를, 겨울은 이별이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그의 종말은 여름이었다. 그는 그의 불온한 것들이 아닌 그의 천국 같은 것들을 보듬어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따지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게는 그럴 권리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뒤를 돌아 집에 오는 것뿐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그가 보낸 문자를 읽었다. 고맙다는 세 글자는 어떤 함축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울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와는 천천히 멀어졌다. 그는 자신의 연인에게 집중했고 나는 나대로 내 삶에 집중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와 그를 모두 아는 내 지인은 조금 놀라워했다. 둘도 없이 다닐 때는 언제고, 왜 이렇게 멀어졌냐고 지인은 물었다. 나는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나와 그의 관계는 한 번의 문답으로 끝낼 수 있는 간단한 것이었다.

 계절이 두 번쯤 바뀌었을 때, 그가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그래서 그와의 재회는 힘들었다. 그는 여전했고, 나는 여전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여전했다면, 전처럼 그를 여전히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그를 보며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내가 아는 그가 분명한데도 나는 그가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불편해하는 나를 보며 그는 그대로 불안해했다. 나는 그의 불안을 보며 깨달았다.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그래서 그에게 나는, 여전히 그의 불온한 것들을 받아줘야 하는 사람이었음을. 허나 변한 내게 그의 불온은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헤어진 연인에게도 하지 않았을 용서를 내게 구했다. 나는 용서를 비는 그를 보며 안타까움보다도 불쾌함을 먼저 느꼈다. 왜 내게? 왜 용서를? 나는 그를 두고 일어나 버스에 올랐다. 핸드폰에는 그에게서 온 연락이 가득했다. 전원을 끄고 눈을 감았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먼지 가득한 구석에 처박힌 그를 꺼내 본 것은 우연히 그가 좋아하던 시를 읽으면서다. 그는 글을 쓰는 나보다 더 글을 사랑했다.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글을 썼고, 읽었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의 성실함이 좋았었다. 그가 가진 밝은 것, 그러나 내게는 허락하지 않았던 온전한 것. 따라서 단 한번도 만나볼 수 없었던 그의 모습. 유일하게나마 내게 허락했던 것은 글이었다. 그는 내게 시를 추천하고, 읽어주었다. 나의 침실로. 그가 처음 읽어주었던 시는 그의 불온한 것들을 닮은 죽음의 시였다.

 얼마 전 그에게서 또 한번의 연락이 왔었다. 그는 내 안부를 물으며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답하지 않고 그의 연락을 거부했다. 그의 불온한 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가진 불안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나는 연락처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펼쳤다. 나의 침실로. 하필이면 그가 사랑하는 글이라니. 책을 덮을까 하다 조심스레 읽어 내려갔다. 내게는 그가 침실이었고 마돈나였다. 정해진 것 없는 불안한 삶에서 유일하게 정해져 있는 안전한 것. 그는 내게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훗날 그에게 연락을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다. 창 밖으로 긴 비가 쏟아져 내린다. 비릿한 밤이 될 것이다.
 



나의 침실로
  - 이상화(李相和)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寢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런지 -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 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느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
내 몸에 피란 피 –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
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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