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고전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고민, 오페라 코지 판 투테

글 입력 2017.07.06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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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고민
오페라 코지 판 투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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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보단 사상적으로 진일보한(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세상을 살면서 고민하게 되는 지점들이 있다. 바로 ‘과거’, 즉 ‘역사나 과거의 작품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하는가’라는 문제다. 아직까지도 고민되는 문제긴 하지만, 어떤 부분에선 스스로 답을 내렸다. 첫 번째는 과거의 문제들을 현대의 시선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즉 과거는 그 시대를 중심으로 바라봐야한다는 것이다. 오페라 <자명고>에서 적국이었던 낙랑과 고구려를 ‘대한민국’의 시선에서 ‘한 민족이니 통합해야한다’라고 말하는 것에 치를 떨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현대적 시선에서의 ‘비판’은 허용돼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작품이나 역사는 그 시대적 시각에서 바라봐야 하지만. 현대적으로 마구 재단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은 가능해야 한다. ‘재단’과 ‘비판’은 다르기 때문이다.

재단은 ‘현대적 시선에서, 과거의 이런 사건은 멍청한 짓이었다.’라는 식의 시선을 말한다. 현대적 가치로 과거의 사건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재단은 그 시대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방법이기에, 과거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반면 비판은 ‘그 맥락 상 어쩔 수 없었지만, 현대에서 바라볼 때 이러한 한계를 갖는다’는 식의 시선을 말한다. 그 시대적 상황을 인정하면서 현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때문에 비판을 통해서는 그 작품을 제대로 바라보면서도 현대적 가치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과거’를 바라볼 때 비판의 작업은 꼭 필요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민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 부터다. 재단해서는 안 되고, 비평해야한다. 그렇다면 ‘내’가 과거의 작품들에 대해서 취해야 할 태도는 어느 지점일까. 아무리 현대적 시선을 버리고 과거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려고 해도 ‘현재’를 살고있는 내 눈에 불편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그 불편함이 반복되다보면 그 작품 자체에 대해서 불쾌한 감정을 갖게 된다. 이미 불쾌한 감정을 갖게 된 과거, 혹은 작품에 대해서 내가 내리는 평가가 과연 제대로 된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감정을 빼고, 또 현대적 시각을 아예 빼고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또 제대로 된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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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코지 판 투테>는 최근 가장 치열하게 이 고민을 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여자는 다 그래’라는 제목과, 미리 공부했던 스토리에서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스토리보다는 음악이 중심이 되는 오페라기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선율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 아름다운 선율에 담기는 내용이 이런 내용이라는 것이 답답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코지 판 투테>의 줄거리는 이렇다. 사관생도인 페란도와 굴리엘모는 자신들 연인의 정조에 대해서 자랑을 늘어놓다가, 그를 비웃는 알폰소와 내기를 하게 된다. 알폰소가 제시하는 상황 속에서도 연인들이 정조를 지킬 수 있을지 실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알폰소는 피오르딜리지와 도라벨라에게 두 남자가 전쟁터로 떠났다고 거짓말을 치고, 두 남자를 다른 사람으로 변장시킨다. 결혼을 약속한 연인의 부재 속, 부유하고 열정적인 남자가 두 여자에게 구애를 하게 된 것이다.

서로 원래 연인이 아닌, 다른 여인에게 구애를 펼치게 된 두 남자. 두 남자는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음독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며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다. 도라벨라가 먼저 넘어가고, 이내 피오르딜리지도 넘어간다. 두 남자는 이에 분노한다. 알폰소는 ‘여자는 다 그런 것’이라며 그걸 명심하고 잘 살아보라고 한다. 대망의 ‘변장한’ 두 남자와 두 여자의 결혼식 날. 두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4명은 결국 모든 오해를 풀고 잘 살게 된다.

이 스토리에선 이 남자들이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는지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일단 여성은 ‘인격체’가 아닌 ‘정조라는 기능을 가진 사물’쯤이다. 그러니 ‘정조’라는 기능을 테스트하기위해서 연인을 속여먹는 짓도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던 것이다. 그 ‘기능’을 테스트 하는 방법도 무지막지하기 짝이 없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정도에서 끝나는 구애가 아니라 음독자살을 시도하는 구애다. 이 정도면 구애가 아니라 반 협박에 가깝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겠다는 이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연인들이 ‘정조’를 위해서라면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극에서는 입맞춤) 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끝까지 넘어오지 않는 피오르딜리지에게는 차라리 자신을 총으로 쏘라는 말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뿐 아니다. 자신들은 속이기 위함이라고 해도 연인이 아닌 다른 여인에게 구애를 하고, 심지어 키스까지 하면서 자신의 연인들이 다른 남성과 키스를 할 때는 대체 왜 분노하는지. 두 남성이 자신의 연인들이 믿음을 배신했다며 분노에 떨 때 정말 코웃음이라도 치고 싶었다. 이야말로 전형적인 내로남불,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 아닌가.

이에 대한 알폰소의 답은 더 가관이다. 자신의 연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던 두 여인을, 연인의 징병부터 새로운 남성들의 구애를 가장한 협박까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몰아넣고서는 하는 말이 ‘여자는 다 그래’다. 절벽에서 사람을 밀어놓고, 죽었다고 ‘쯧쯧, 저 사람은 원래 죽을 사람이었어.’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절정부분에서 알폰소가 말하는 ‘코지 판 투테’, 즉 ‘여자들은 다 그렇다’는 말이 뜻하는 바는 자명하다. 원래 남자들을 가지고 놀고, 정조가 없는 여성들따위 ‘여자는 다 그렇다’고 생각하며 믿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신뢰를 깨뜨리고, 남성들이 자신들만의 유대를 만들기에 용이하다. ‘마초’적임을 부추기는 사고인 것이다. 극의 절정이니만큼 알폰소 배우의 역량도 드러나고, 음색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곡이었지만. 차마 손이 떨어지지 않아 박수를 칠 수 없었다. 그 내용에 박수를 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 남성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서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물론 원래의 연인을 배신한 두 여성도 떳떳할 이유는 없지만 두 여성을 속였던, 아무리 수단으로써라도 다른 여성에게 구애하고 입맞춤을 했던 두 남자도 결코 떳떳하지 못하다. 하지만 두 남성은 떳떳하기 그지없고, 두 여인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다. ‘정조’를 요구받는 것은 여성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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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코지 판 투테>의 이야기가 쓰였던 고전파 시대에선 이게 당연했을 것이다.  여성은 무대에 오를 수조차 없어 카스트라토를 썼던 바로크 시대 바로 다음이다. 여성의 인권은 터무니없이 낮았던 것이다. 그 시각으로 보면 <코지 판 투테>에서 불편할 것은 없다. 오히려 스와핑이라는, 그 시대에선 꿈도 꾸지 못할 소재를 사용한 진보적인 극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극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그 시대의 눈을 장착하려고 해도, 이미 ‘나’의 사고방식 속에선 이 서사 속 인물들에게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과거의 서사나 극을 볼 땐 극을 감상하는 ‘나’ 조차도 그 시대로 맞춰놔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식으로는 작품에 대해서 수동적인 태도밖에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지 판 투테>를 보며, 또 보고 나와서. 앞으로도 수도 없이 마주할, 이 불편해하면서도 불편한 감정 자체가 애매모호하게 느껴지는 이러한 작품들에 대한 올바른 나의 태도를 수도 없이 고민해봤지만. 사실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현대적 사상 때문에 모든 고전이 공감을 얻지 못해 사장되는 것도, 또 고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과거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결코 올바른 방향은 아닌 것 같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겠는 지금으로서는 그저, 비판은 하되 그 비판이 내 안에서 작품의 ‘작품성’까지는 건들지 않기를 노력하는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코지 판 투테>를 떠올리면 결코 좋게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코지 판 투테>를 폄하하거나 그 작품성 자체를 나쁘다고 평가하지는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과거를 그 시대의 시각으로 바라봐야한다는 이성적인 판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감정적인 거부감의 충돌. ‘고전’은 ‘고전’대로 그 가치를 인정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과, ‘고전’의 무분별한 답습으로 과거 사상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것은 막아야한다는 생각의 충돌. 아마 당분간, 어쩌면 평생 끝나지 않을 고민이겠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고민해보려고 한다. 내가 정말 사랑해 마지않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가졌지만, 그 서사에는 불쾌감이 드는 <코지 판 투테>를 그 대표적인 예시로 삼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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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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