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옥자 >, 디스토피아를 향한 생태적 외침 [문화 전반]

글 입력 2017.07.03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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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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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토피아는 픽션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최악의 경우 닥쳐올 가장 부정적이고 어두운 미래상을 보여줌으로써 현재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한다. 그 대표적인 예시들과는 이야기의 궤도가 약간 다르지만, 나는 < 옥자 >를 보고 왜인지 디스토피아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물론 < 옥자 >가 그리는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디스토피아가 아닐 수도 있다. 옥자는 돼지이고, 고통 받았지만 결국에는 미자와 함께 돌아오고, 사람들도 큰 탈 없이 일상을 되찾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변화 없는 결말이 무언가 더 안타까운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고, 이 세상이 가축들에게 픽션이 아니라 실현된 디스토피아라면 그 되찾은 일상의 반복성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절망적일지 생각했다.

 세계 1등 슈퍼돼지 옥자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해 관계는 다양하면서도 전형적이다. 미자의 할아버지 희봉은 옥자를 정성껏 키웠고 아끼지만, 하나뿐인 손녀가 매일 돼지랑만 쏘다니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는다. 그는 옥자를 사지 못하는 돈으로 옥자 대신인 금돼지를 산다. 하지만 미자는 금 돼지를 보고 기뻐하기는커녕 노잣돈과 함께 복대에 쑤셔 넣고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인 옥자를 되찾으러 무작정 서울로 떠난다. 슈퍼돼지를 생산한 회사 미란도의 CEO 루시는 아버지와 언니 낸시로 인해 악명을 떨치게 된 회사의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슈퍼돼지를 이용한다. 미란도의 얼굴, 자칭 동물 애호가 죠니 박사는 옥자를 자기 이미지에 이용해먹으면서도, 옥자와 미자로 인해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미래가 불투명해지자 옥자를 학대한다. 동물해방전선 ALF는 옥자를 구하지만, 옥자에게 블랙박스를 설치해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아 더 많은 돼지들을 구하려는 작전을 세운다. 미자는 이 작전에 “옥자와 산으로 가고 싶다”고 대답하지만, 자신의 노력이 수포가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 케이의 나르시즘적인 충동으로 통역이 어긋나고 작전은 실행된다. 그리고 이 소동을 마무리하는 것은 동물해방전선의 작전이 아니라 미자와 낸시의 물물교환 딜이다.

 미자가 슈퍼돼지 옥자의 몸값으로 황금 돼지를 내밀고 낸시가 콜 하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막스이자, 어딘가 가장 맥 빠지는 부분이다. 돈이 아니라 금이기에 더 강렬했던… 역시 글로벌 사회에서 재물은 항상 통하는 인류 공동의 소통 수단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동물해방전선 멤버들의 피땀눈물이 무색할 정도로 거래는 쉽게 성사된다. 물론 자본주의가 최고야! 라는 느낌은 분명히 아니다. 황금 돼지를 적에게 굴려 보내기 전까지 미자와 사람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 과정은 여느 때 같았으면 “왜 그걸 이제 꺼냈어!”라고 다그칠 만큼 성질 급한 관객마저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옥자를 위해 결연한 표정으로 내내 뛰고, 뛰고 또 뛰어다니던 작은 소녀의 노력이 그 고달픔과는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슥 닦으면 금방 깨끗해지는 황금 돼지에서 빛을 발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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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거나 미자와 옥자의 이야기는 해피앤딩인 것처럼 보인다. 사려 깊은 눈의 친구는 미자를 안고 잠드는 일상을 찾았고, 식구가 하나 더 늘기도 했다. 엄마 아빠 돼지의 가슴 아픈 마지막 발버둥으로 데려오게 된 친구이지만 그들의 구출은 미자와 옥자가 커버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기에, 셋의 결말은 현실적이게도 평화롭다. 옥자를 잃기 전 그랬듯 산으로 계곡으로 함께 쏘다니는 일상은 잔잔하지만 어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탈출하지 못했던 수백 마리의 슈퍼 돼지들, 미자가 목격한 도살장의 끔찍한 효율성, 자본주의 숭배자 언니 낸시의 승리, 아니면 지금도 도축장 앞에서 줄을 서 있을, 영리한 눈을 한 현실의 돼지들이 마음에 걸려서.

 < 옥자 >를 보기 위해 30분 동안 버스를 타고 대한극장으로 갔는데, 한 가지 안 좋은 점이 있었다면 뒷자리에 상영 내내 쫑알거리는 꼬맹이 하나가 앉았다는 것이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그 애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우리 오늘 소고기 먹자!” 였다. 최소한의 개연성으로 머릿속에서 돼지는 먹지 말자는 공식이 성립했나 본데 어리니까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조금 씁쓸했다. 같이 본 친구는 도축장 장면이 더 잔인했어야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 그 애가 오늘 소고기를 먹으면 내일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겠지. 그리고 나도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지나면 “옥자 귀여웠는데” 따위 소리를 하며 태연하게 삼겹살을 먹을 거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먹이 사슬 꼭대기에 있는 처지로서, 인간의 이런 고민은 항상 딜레마이다. 차라리 동물과 같이 사이클의 한 부분이라면 강한 존재가 포식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니까, 먹고 먹히는 것을 순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두 발로 걷고 생각을 하고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리는 인간은 너무 오래 전부터 생태계의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럼 어디까지 먹고 먹지 말아야 하는가? 먹는 행위 자체는 어쩔 수 없고, 그 경계는 모호하다. 하지만 적어도, 오로지 먹기 위해 동물을 탄생시킨다는 것은, 먹히기 위해 태어난 그 존재는 너무 슬프지 않은가. 우리가 사랑하는 애완동물들과 같이, 네 발과 꼬리가 달리고 맑은 눈과 복실한 털을 가진 생명체. 옥자처럼, 잘 돌봐주면 사랑스럽게 따를지도 모르는. 소들은 태어나서 십 수 개월 간 사료를 먹고 살을 찌운 후 도축된다. 닭들은 자기 몸에 꼭 맞는 크기의 철창에 갇혀 기계적인 생산 행위를 반복한다. 사람이라면 미쳐버릴 것이다. 언젠가 인간보다 더 상위 종이 나타나서, 우리를 캐비닛에 가둬 놓고 가장 맛있어 질 때까지 키운 후 잡아먹는다면?

 지금의 양식 행태는 아무도 뽑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뿌리 내린 자본주의와 편리성을 추구하는 우리의 성향으로부터 비롯된 문제이니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 옥자 > 또한 그 사실을 인정하는 듯한 결론을 보여준다. 옥자만큼이나 똘똘하고 깊은 눈을 가진 돼지들은 고깃덩어리로 변해 전 세계에 유통되어 미란도 자본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도축 공장은 미자와 옥자가 되찾은 일상만큼이나 당연하게,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시스템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나 한 명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 체계성은 완벽한 만큼 틈도 없고 눈물도 정도 없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건 그걸 알면서도 꿋꿋한 신념을 지키는, 마치 바위에 계란 치기와 같은 용기이다.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나는 동물을 사랑하지만, 바위에 계란 치기를 하며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비겁하게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다. 한 꺼풀 벗겨 보면 자칭 동물 애호가라면서 이기적인 복수심으로 옥자의 살을 추출한 죠니 박사와 비슷한 태도가 아닌가.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세상은 가축들에게만 진행된 디스토피아지만, 언젠가 생명을 좀먹는 이 자본주의의 무심함과 폭력성은 돌고 돌아 나를 후려칠 것이라고. 이 때 자본주의에 무방비하게 몸을 맡긴 사람들, 단단한 신념으로 다져진 사람들 중 누가 더 잘 대처할 수 있을까. 봉준호 감독은 세상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후자의 신념을 조금 더 굳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 옥자 >의 세상을 향한 작은 외침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울리기를, 비겁한 마음에 용기를 주기를, 부끄러운 자본주의에 조금이라도 생명력을 불어넣기를,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도 오래 오래 여운이 남기를 바란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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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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