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찬란한 언어로 빚은 비극

연극 '그리스의 여인들 안티고네' 를 보고
글 입력 2017.06.2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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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여인들 안티고네


약 1시간. 짧다면 짧은 공연시간이었지만 <그리스의 여인들 안티고네>가 가진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세 인물이 자살하고 한 인물은 홀로 남겨지는 비극을 두고 아름답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극을 보며 가장 크게 느낀 건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집으로 돌아오며 이 비극이 왜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졌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게 1시간 내내 극을 가득 채운 대사들, 그리고 그 대사들을 이루고 있던 아름다운 언어였다.

연극이 시작되고 에우리디케 역을 맡은 배우의 입에서 극의 배경이 되는 오이디푸스 비극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부터 배우의 목소리는 매혹적이고 그 목소리가 이야기하는 비극은 너무 비참해서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아 계속 이야기만 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 뒤로 본격적인 극이 시작되자 재치있는 대사들이 공백없이 이어졌다. 촘촘하게 짜인 대사들이 인상적이어서 온전히 기억나는 부분이 있으면 여기에 옮겨적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아쉽다. 각각 자리에서 조화롭게 제 자리를 지키던 대사는 때로 아주 엉뚱한 이야기를 하며 서로 겹치고 엉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모두 각자 다른 궤도를 그리며 돌지만 조화를 이루는 태양계를 보는 것 같았다. 장황한 수사와 반복되는 문장구조는 대사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렇게 찬란한 언어로 이루어진 대사가 만들어내는 건 결국 비극이라는 사실이 모순적이지만 아름답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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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전체가 주는 느낌은 '아름다움'이었지만 들여다볼수록 <그리스의 여인들 안티고네>는 명백한 비극이다. 오이디푸스에서 시작된 비극은 그 자식들에게까지 손아귀를 뻗쳤다. 주인공 안티고네는 왕명을 거역하고 끝까지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며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약혼남이자 크레온 왕의 아들인 하이몬의 죽음을, 이어서 하이몬의 죽음은 어머니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부른다. 결국 크레온 왕은 안티고네를 응징한 대가로 자신의 아들과 아내를 잃어야 했다.

혼자 남은 크레온 왕은 절규한다. 안티고네를 막다른 절벽으로 몰아가며 했던 '너는 혼자다', '죽음에 가까운 형벌을 내릴 것이다'는 말을 마지막에는 크레온이 그대로 받게 되었다.

'결국 혼자 남은 사람은 누구지? 산채로 묻힌 사람은 누구지? 정말로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은 누구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안티고네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크레온에게 승리했고 크레온은 목숨을 부지함으로써 패배했다고 볼 수 있다. 승리한 사람은 죽었기 때문에 승리했다는 걸 알지 못하고, 패배한 사람은 살아서 그 상실감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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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결구도는 연극 팜플렛의 설명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개인의 신념과 그런 개인의 신념을 짓밟는 거대권력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안티고네는 죽었지만 승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 그 어떤 권력보다도 위대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극을 보면서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갈등이 개인 신념과 권력의 대결보다는 신념과 신념의 대결처럼 느껴졌다. 크레온 왕이 도시 전체에 내린 명령도 어쨌거나 자신의 왕권을 포함해 전란 직후 혼란한 도시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왕의 신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잘못된 신념이라 해도, 크레온 자신만큼은 최선이라 믿었기 때문에 끝까지 지키려 했을 것이다.

모두가 죽고 홀로 남아 "날 좀 깊숙히 찔러다오" 절규하는 크레온 왕의 모습은 참 씁쓸했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비극을 보며 신념을 가지고 그걸 지키려는 인간은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념을 지킨다는 건 그 신념에 어긋나는 상황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가장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 신념도 없이 그저 하루 살아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일 테지만 그런 삶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인간답지도 않다. 신념을 끝까지 지키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극이 의도한 바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막이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엉뚱하게도 이런 물음이 마음 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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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언어로 빚은 아름다운 비극, <그리스의 여인들 안티고네>는 6월 25일자로 막을 내리지만 다가오는 8월에 그리스의 여인들 2탄이라 할 수 있는 <트로이의 여인들>이 공연 예정이라고 하니 보러가도 좋을 것 같다. 또 어떤 빛나는 대사를 만날 수 있을지,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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