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거대자본 앞의 탐욕적 개인, 옥수수와 나 [문학]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글 입력 2017.06.2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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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막한 소설 판에서 어떤 출구가 있는 것일까 고민하는 작가들이 없지 않아 있다고 한다.
김영하는 이 점에 남달리 민첩했다. 그 첫 번째 시도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라는 책이다. 글쓰기에 자신이 없고 안절부절 못하며 겁먹은 목소리를 내던 90년대 소설 판에서 당당한 목소리를 질렀던 작가이다. 작품 <옥수수와 나> 또한 이것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옥수수와 나>는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육체적, 물질적 욕망이 삶의 진정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현실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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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신병원에 철석같이 스스로를 옥수수라 믿는 남자가 있었다. 오랜 치료와 상담을 통해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겨우 납득한 이 환자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귀가 조치되었다. 그러나 며칠 되지도 않아 혼비백산 병원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무슨 일입니까?”
의사가 물었다.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환자는 몸을 떨며 아직도 닭이 자기를 쫓아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면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의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 이제 그거 아시잖아요?”

환자는 말했다.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시작은 ‘한 정신병원에 철석같이 스스로를 옥수수라 믿는 남자가 있다’로 시작된다.
 소설의 화자는 자신이 옥수수가 아닌데도 닭들이 자기를 옥수수라고 쫓아오는 망상에 시달린다.
이러한 우화적 요소가 덧붙여진 환상적인 모티프를 소설 속 이야기의 앞뒤에 배치해놓고 있다. 이 환상적 모티프는 프레임 속에 들어있는 한 소설가의 삶을 통해 그대로 구체화 된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소설은 인물들의 관계망으로 인해 얽힌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예컨대 아내(수지)와 이혼 상태에 있는 나(박만수)의 이야기, 아내와 출판사 사장의 불륜 관계에 대한 의심,섹스 파트너가 있는 두 명의 친구 이야기, 글쓰기를 위해 미국에 가서 만난 여자와의 불륜 관계와 그의 삶을 투영하여 쓰는 소설, 마지막으로 나의 아내와 내연 관계에 있는 친구의 소식까지.
 
 결말은 다시, 정신병원의 '나'로 돌아온다. 이 때, 닭과 옥수수가 재등장하며 자신의 존재 위치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주인공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는 소설에서 보여지는 삶의 가치 상실, 인간관계의 파괴, 자본주의 아래 물질 제도의 횡포로 인한 정체성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의 비정상적인 관념

 '인간의 사랑이 진정성을 상실한 채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섹스의 소비와 교환으로 바뀌고, 글쓰기가 그 정신적 가치를 잃고 물질적 요구에 따라 제작되는 현실 자체를 문제로 삼고 있다.'



“섹스 파트너와 뭔가를 교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 나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교환 하다니? 뭘? 전쟁 당사국들이 전쟁을 교환하지 않듯이, 바둑 친구들이 바둑을 교환하지 않듯이, 섹스파트너들끼리도 섹스를 교환하지 않아. 나와 그녀는 뭔가를 교환하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낭비하기 위해 만나는 거야. 우리는 시간과 에너지를 함께 소비하지. 그러나 궁극적으로 낭비하는 것은 바로 섹스라는 관념이야. ‘나는 섹스를 한다’라는 무거운 관념을, 덤프트럭이 모래를 쏟아놓듯 훌훌 던져버리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박만수의 친구인 '철학 교수'는 섹스를 ‘관념의 소비’로 본다. 관념이 차오를 때 함께 상품을 사는 기쁨을 얻듯이 관념을 소비함으로써 행복을 얻는 것이다. 그는 에너지를 방출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교환이라는 것은 서로의 동등한 상태에서 애정을 주고 받는 관계이다. 또 다른 친구는, 섹스가 교환일 때 오히려 변질된다고 한다. 애정을 주는 것과 받는 것은 모두 환상에 불과할 뿐이고, 단지 섹스를 한다는 것은 서로 만나서 생리적 욕구를 소비함으로써 행복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들 사이엔 최소한의 책임이나 연민도 없다. 그저 몸으로 탐하는 흥분이 있을 뿐이며 몸으로 탐하지 않을 때는 난삽한 언어의 유희로 변형된 흥분을 즐긴다.
 주인공 박만수의 욕망은 철저하게 현실 속에 막혀 있고 그의 현실은 갖추어진 것이 없다. 이 강박에 의한 억압은 섹스의 장애이고 그러한 장애는 남들(친구들, 아내)의 섹스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박만수는 박영선을 만나면서 억압된 신경들은 사라지고 섹스를 통해 그동안의 강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가 그동안 작품을 쓸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섹스라는 억압된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무의식 속에서 욕망했던 것이 해소됨으로써 작가로서 복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성적 욕망이 무의식 속에 있더라도 그동안 현실에서 구동되지 않고 억압된 상태였기 때문에, 작가로서 능력을 모두 상실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글쓰기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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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만수는 현실과 유리된 채 존재감을 상실한 무능한 사람이다. 그러한 그를 현실로 복귀시키는 것은 글쓰기이고, 글을 쓸 때 그의 존재감을 찾는다. 그러나 출판사 사장에 의해 박만수는 착취 관계에 빠진다. 모든 일상이 거대 자본에 편입되면서 개인의 정체성은 변질되고 상징계의 질서에 편입되어, 예술이 자본으로 생산된 ‘상품’으로 판매된다는 경제 논리의 현실을 출판사 사장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장이 도대체 왜 내 원고를 그렇게 받으려고 하는 거냐?”
 “당신 소설을 좋아한대.”
 “돈밖에 모르는 사람인 줄 알고 만났더니 그런 사람같이 보이지는 않았는데 헤어지고 나서 생각 해보니 역시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 맞는 것 같고,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이 잘 팔리지도 않을 내 소설을 받으려고 하는 건가 싶어서 말이야.”
 “책을 쓸 의사가 전혀 없으면서도 거액의 계약금을 받아갔으니 사기라고 주장할 거야. 사기라면 형사사건이 되지. 그러니까 사기로 일단 걸고, 민사소송도 동시에 진행하는 거야.”
 “넌 그러니까 순진하게 자본가에게 이용당하는 거야.”



 그리하여 「옥수수와 나」는 예술가들의 작품이 소비의 예술품으로 전락되어 소설이 물질화되는 것을 문제로 삼고 있다. 박만수는 생산 된 것을 제 값에 받지 못하고 자본가에 의해서 강탈당하는 모습이며, 자본가인 사장은 생산성이 있는 예술가를 조종하여 상품의 가치를 극대화하려 한다. 소설이라는 글쓰기 자체가 정신적 가치를 잃고 물질적 요구에 따라 제작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닭과 옥수수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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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서두와 끝 부분에 나오는 ‘닭’과 ‘옥수수’는 상징적 단어이다. 옥수수는 주인공 박만수, 닭은 수지, 사장, 등의 인물들로 표상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결국 닭은 억압을 가하는 탐욕적인 자본가를 상징하며 옥수수는 자본의 세계에서 희생당하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작가는 자본의 횡포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현실을 또한 비판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것의 극복 가능성은 제시하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인간관계의 파괴를 도시적 문명과 제도의 횡포로 읽어내는 김영하의 시각 자체를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성지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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