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향연'

진정한 사랑에 대한 고찰
글 입력 2017.06.22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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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연애)에 대한 고찰'


Ⅰ. 서론

Ⅱ. 본론

1) 불완전한 사랑

- 결여된 것에 대한 사랑
- 잘못된 연애 방식 : 소유

2) 완전한 사랑

- 주체로서의 성숙한 연애

Ⅲ. 결론


Ⅰ. 서론
 ‘사랑’을 정의내릴 수 있는가? 사랑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이다. 과연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사랑에 대한 정의는 개개인마다 다르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용인 되는 사랑과 그렇지 않은 사랑의 범주는 나눠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정상적인 사랑과 이에 반하는 비정상적인 사랑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전적 의미에서는 정상적인 사랑의 범주를 확정짓기에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범주에서 벗어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어떻게 따져야 하는 것일까? '향연'에서는 에로스(사랑)를 예찬하는 잔치에서 등장인물인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람과 사람의 사랑에 중점을 두고 논의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대화가 마지막에 이를 때쯤에는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가벼운 감정적 문제가 아니라 이성적 분석을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대화 중 결여된 것에 대한 사랑을 언급한다. 그는 단순히 에로스를 찬양만 하는 것에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며 에로스에 대한 속성을 다시 한 번 더 고찰하며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에 따르자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고,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에로스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에로스는 특정한 것에 대한 사랑이며 이것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욕망을 느끼고 동시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지속적으로 보존되기를 원한다. 즉, 그는 ‘에로스’를 결여하고 있는 대상을 사랑하고 욕망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의 말을 이해하다보면 에로스에 대한 시선이 오묘해진다. 이에 본 에세이는 플라톤의 ‘향연’을 바탕으로 현대인들의 사랑을 세세히 파헤쳐 보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고찰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불완전한 사랑 (연애)
- 결여된 것에 대한 사랑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결여된 것에 대한 사랑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이라는 작품 속의 소녀와 중국인 남성의 모습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인'에서 소녀는 열다섯 살 반에 처음으로 성관계를 맺는다. 어린 나이지만 소녀는 대담하고 관능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소녀는 가족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체 항상 마음의 결핍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런 소녀에게 한 눈에 반한 중국인 남성 또한 엄격한 가정에서 자란 인물로 낯선 타지에서 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도록 강요받으며 외롭게 살아가는 결핍된 인물로 묘사된다. 이 둘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을 때, 소녀는 그녀의 내면에 존재하는 퇴폐미를 중국인 남성이 모두 헤아려 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는 타인이 아닌 오직 스스로라고 말하면서 중국인 남성에게 사랑해달라고 말하는 대신 자신을 쉽게 대해달라고 요구한다. 소녀는 가족을 부양해야한다는 내면에 존재하는 의무감과, 이에 반하는 내재되어 있는 욕망의 표출 등으로 그와 정서적인 교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녀의 배타적인 사랑에 중국인 남성은 외로움을 느끼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 둘이 관계를 가질 때, 그는 결국 눈물을 흘린다. 그의 눈물에는 소녀를 향한 사랑에 대한 욕망, 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소녀에 대한 원망, 그리고 동시에 이 원망을 넘어서는 소녀를 향한 그의 깊은 사랑을 드러낸다. 표면적으로 그는 소녀를 쉽게 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는 그녀를 대하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그녀를 향한 진심이 드러난다. 그가 소녀를 이렇게 소중히 대하는 태도에는 이유가 있다. 이 둘 사이에 서로가 인지하는 동질성이 있기 때문이다.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두 사람 모두 가족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결핍된 상태로 서로를 만났기 때문에 서로의 육체를 통해 결핍된 사랑을 채우려는 욕구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둘의 사랑은 정서적 교감이 없이 단지, 결핍과 열정으로 이뤄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그가 자신의 진정한 연인이었음을 깨닫긴 하지만, 너무나도 어린 열다섯 살 반의 소녀는 정신적으로 미성숙했기 때문에 그와 정신과 육체가 합일된 사랑을 나누지 못한 것이다.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이해하는 존재인 동시에 서로의 열정을 채워주기 위한 존재지만, 결국은 정신적인 교감은 이룰 수 없는 미숙한 관계가 이 둘의 관계인 것이다. 다른 시점으로 바라봤을 때, 이 둘의 사랑은 한계적인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 나타나는 소녀의 독백

처음부터 우리는 두 사람의 공유하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신문 기사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눌 것이다. 늘 같은 감정으로. 

을 살펴보면, 그녀는 그와 끝이 보이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 남성 역시 그의 가족과 맞서 그녀를 끝까지 사랑하면서 함께 도망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끝이 존재하는 사랑임을 알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워하는 마음이 소녀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크기 때문에 결국 현실에서 그녀를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소녀는 이미 깨달은 것이다. 이에 미숙하고 헌신과 열정만 넘치는 이 둘의 관계는 사랑의 무모한 양상을 보여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소녀와 중국인 남성은 지속될 수 없는 사랑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욕망과 혐오감 그리고 애증과 애정이 뒤섞인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즉, '연인'이라는 작품은 사랑과 욕망 사이의 모호한 경계, 그리고 이것 때문에 생기는 혼란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욕망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통해 사랑의 다양한 양상을 작품 속에 녹여내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작품 속 소녀와 중국인 남성의 사랑은 현대 사회의 연애 문제에 빗대어 살펴 볼 수 있다.


- 잘못된 연애 방식 : 소유
 현대 사회는 연애 담론의 홍수 사회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연애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 하고 싶은 것으로 정의 된 그 순간부터 이 사실을 당연시 여기며 살아왔다. 특히 최근 연애 담론이 뜨거워지면서 연애를 위한 자기 계발과 경쟁적 연애에 목매달다 보니 정작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2순위로 밀려나 버렸다. 그렇다면 현대의 연애는 어떤 것이 중심이 되고 있는지 알아보겠다. 오늘날은 연애를 하나의 기술로 여기며 욕망과 윤리 사이의 갈등이라고 표현한다.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전보다 더 절실해진 욕망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소유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 사회 속에서의 재산 소유는 그 사람의 사회적 계층까지 결정한다. 이러한 소유 중심의 사회는 사람들의 정신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연애 역시 소유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자아의 욕망이 있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그 사랑과 인정을 독점하고 싶고, 내가 바라는 대로 그가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다. 한편 내 마음과 같지 않은 타자가 있다. 내 마음과 같지 않은 그를, 같을 수 없는 그를 내가 사랑한다는 사실이 윤리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내 욕망은 상대를 집어삼킬 수도 있다. 내가 사랑과 인정을 원하는 타자가 그 사람인 한 나는 내 욕망을 성찰하고 제한하고 협상해야 한다. (생략)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욕망과 윤리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생략) 나의 속박으로 상대가 고통을 호소한다면 우리는 사랑 혹은 윤리로써 나의 소유욕을 통제해야 한다.”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연애가 범람하는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누군가를 독점하고자 한다. 때로는 당사자가 아닌 상대방 역시 욕망을 갖고 있어서 상대의 욕망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누군가가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이 갑의 역할을 하면서 주도권을 갖고 어떤 사람이 패배자가 되어서 을의 역할을 하게 될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심해져서 연애하는 대상이 상처를 받거나 고통을 호소할 경우에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나눈다면 당연히 소유욕이 생긴다고 말하면서 심각하게만 소유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은 기준이 모호하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에서 찾아보겠다.  


2) 완전한 사랑
- 주체로서의 성숙한 연애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어떤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고 설명하면서 자아를 확인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우선, 스스로의 자아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른 무언가를 소유하는 방식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 두 가지 방법들 중 소유는 사람들에게 더 널리 알려져 있고 실행되고 있지만 없어져야 할 옳지 못한 방법이며, 자아의 확장은 행해지기 어렵지만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항상 소유를 당연시 여기면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소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말은 어색하지 않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소유를 통한 자아 확인의 방법은 유효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 소유를 했을 당시에는 빼앗길 염려가 없기 때문에 불안감이 일시적으로 사라지지만, 한 번 소유를 한 대상은 더 이상 충족감을 주지 않기 때문에 더 심한 소비를 행하게 된다. 결국 소유는 하면 할수록 중독되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생략)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떠밀려서 방어적이 되며 가혹해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결국 외로워진다.'

소유라는 것은 후에 빼앗길 가능성을 갖고 있다. 소유하려고 애쓰는 것은 소비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불안정성, 그리고 두려움 등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에리히 프롬은 많이 소유하는 것 보다 가치 있게 존재하는 것을 중시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삶을 이어 나갈 때, 삶의 가치가 높아지는 능동적인 삶을 강조한다. 연인은 사람이기에 불확실한 존재다. 사람은 불변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변하며 그 상대방을 완전한 내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 보다 훨씬 부질없는 것이다. 불확실한 어떤 것을 완전히 소유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부터 허상은 만들어지며, 불확실한 존재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소유에 대한 가중적인 위험을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능동적인 주체인 사랑하는 연인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행동은 상대방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며, 자신 스스로도 벼랑 끝으로 내몰며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에 연인을 소유가 아닌 주제 자체로서 인정하고 바라볼 때, 즉 주체 대 주체로서의 만남을 이어나갈 때 더욱 더 진정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로서의 성숙한 연애를 위해서는 주체의 위태로움이 없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인정이 자아를 인정할 수 있는 주체성인데 이 자아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체성은 보이지 않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스스로 인식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나마 조금 더 쉬운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이며, 타자가 바라보는 나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고 누구인지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 증명을 피해버린 것이기 때문에 대상이 사라진 상태의 오직 내 본연의 모습을 증명해 낼 수 없게 되어 불완전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상대론적 자아증명법은 비교적 쉬운 방식이지만 스스로를 완벽하게 증명해 낼 수 없다. 이렇게 불완전한 자아는 완전해지고자 상대적인 합일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연애,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는 근본적 원인이 되는 것이다. 상대론적 자아증명법에서 완전하지 못한 자아를 채우기 위해 사랑이라는 행위가 행해진다. 사람들은 연애를 통해 그 불완전함이 채워지기를 원하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 상호관계성이 유지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면 그 상대방에게 나를 사랑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상대방이 나의 요구에 응한다면 그 상대방 역시 나에게 소중하고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며, 상호관계 속에서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나’에서 ‘우리’로 변환되는 시점이다. 즉,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랑의 근원적인 목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상호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체 이상적인 사랑을 실현시키지 못한다. 서로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갑, 을 관계나 수직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랑에 있어서는 평등이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은 상호관계다. 또한 성공하기 어렵고 불완전성을 동반하기 십상이며, 스스로 항상 타인을 통해 자신의 불완전함을 채우려고 노력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연애는 진정한 사랑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흔히 오늘날 현대인들의 연애에서는 통제와 집착을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정말 사랑과 애정을 확인하는 수단일까? 통제와 집착은 모두 상대방을 객체화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상대방을 완전한 주체로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을 원하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 수 있는데, 만약 사랑하는 연인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고, 내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분명히 언짢아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연애라는 건,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상대방이 자신을 객체화하고 사랑하는데, 이것을 상대방이 자신의 주체성을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모순적이기 때문에 해결책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들을 인지하지 않은 것과 인지하는 것은 정말 큰 차이를 갖게 된다. 상대방을 객체화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상대방을 주체로서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Ⅲ. 결론
 실질적으로 온전히 사랑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자신이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주체라는 것을 인지하면 된다. 윗글에서 얘기한 모든 문제점들은 스스로를 불완전한 주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며, 자신의 불완전한 주체성을 남으로부터 채우는 것에서부터 야기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완벽한 주체성을 깨닫고 온전한 주체로서의 나가 되어야 한다. 그 후에, 상대방 또한 완벽한 주체로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며, 연인 관계에서 어느 한 쪽이 우세하고 열등한지를 따지는 갑, 을 관계를 벗어나 서로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함께 발전해 나가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종속되어 있지 않은 동등한 연인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주체를 인간으로 한정짓지 않고 진리와 지혜로 확장해 생각해본다면 사랑에 대한 고차원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진리와 지혜를 기반으로 한 사랑은 철학적이다. 그리고 이 철학적이라는 것은 진리와 지혜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과거와 비교했을 때 훨씬 더 혁신적이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을 즐기지 못한 채, 아직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소유만을 중시하면서 자신의 삶을 틀에 가둔다. 플라톤은 현대인의 이런 모습을 ‘아름다운 척 하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로 묘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척’이 아닌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을 위해 진실 된 사랑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 진리를 알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향연'이 현대인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문헌>
플라톤 [향연 Symposion] 이제이북스, 2010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민음사, 2007

김만석, 신현아, 임세화, 정지민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 알마, 2014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2012


[이수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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