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인간의 명예는 어떻게 짓밟히는가.

글 입력 2017.06.22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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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타인에 딱지를 붙인다. ‘블랙리스트’, ‘종북’ 등 우리 사회에는 타인을 규정하는 많은 이름표들이 존재한다. 그 딱지들은 인간을 그 인간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표로 평가받게 한다. 더욱이 사건을 취재하고 사실에 입각해 보도해야하는 언론이 사람에게 집단에게 이름표를 붙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권익을 주장하던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어느 선량한 시민은 오보로 인해 한순간에 성폭행 범이 되기도 한다. 연극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어느 평범한 소시민의 명예가 한순간에 짓밟히는 사건을 보여준다.
 
  댄스파티에서 만난 이상형을 집으로 데려와 하룻밤을 보낸 카타리나는 다음날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그녀가 하룻밤을 보낸 남자가 악명 높은 은행 강도였던 것이다.

  착실하고 매사에 꼼꼼한 가정부였던 카타리나는 검찰 조사에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위해 애 쓴다. 그러나 카타리나에게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미지의 남자가 있었으며, 그녀가 비오는 밤마다 어디론가 차를 타고 다녀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카타리나는 궁지에 몰린다. 한편, 왜곡과 날조된 보도를 통해 카타리나를 은행 강도의 정부(情婦)이자 빨갱이로 단정 짓는 신문 '차이통'으로 인하여 카타리나의 가까운 지인들조차 그녀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하는데...
(연극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시놉시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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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범한 여자 카타리나가 창녀, 빨갱이로 프레임화 되기까지.

  카타리나 블룸은 소시민이다. 그녀는 27년간 가정부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착실하게 살아왔다. 그녀가 은행 강도의 정부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은행 강도 괴텐과 하룻밤을 보내고 그의 도주를 도왔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그녀는 온갖 마녀의 의장을 덧입는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를 지녔다는 사실은 ‘빨갱이’라는 혐의을 덧칠하고 수상한 남자가 몇 차례 방문했고, 집에 고가의 반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괴테의 정부라는 혐의를 덧칠한다. 그녀의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는 언론의 입맛에 따라 왜곡되고 짜 맞춰져 카타리나의 인생은 대중 앞에 맛있는 고기처럼 놓인다.

  정치권은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만들기 위해, 혹은 어떤 이슈를 덮기 위해, ‘저질 언론사’ 차이퉁은 신문 판매 부수의 증가를 위해 카타리나의 인생을 요리한다. 정치와 언론의 거대한 폭력 속에 놓인 소시민을 경찰과 검찰 또한 지켜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를 ‘괴테의 정부’라는 맞춰진 프레임 안으로 계속 몰고 간다.

  카타리나가 한 남자에게 옷과 스타킹을 가위로 난도질 당하고,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덧바른 채 몸부림 치는 장면은 극의 전체를 상징적으로 스케치한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클럽 음악이 나오는 와중에 몸부림친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모습은 ‘클럽 음악’이라는 프레임 하에 마치 ‘창녀’가 난잡하게 춤추는 것과 같이 보이게 한다.



2. 제3자가 그녀를 소비하는 방식

  카타리나의 혐의는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엘제 이모와 블로르나 부부에게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관객에게 까지도. 일정 부분에서 관객들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결백하다면, 카타리나를 2년간 찾아왔던 그 남자의 정체를 밝히고, 반지가 어디서 났는지 밝히면 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몇 번씩이나 되물을 것이다. 진짜 카타리나는 혐의가 없는 건가? 혐의가 없다면 왜 말하지 않는 걸까?

  그게 폭력의 희생자를 제3자가 소비하는 방식이다. 차이퉁을 읽고 그녀에게 악성 전화나 엽서를 보내는 이들에게 비난을 가하지만, 결국은 완벽하게 그녀를 믿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그 사건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그녀는 그냥, 그랬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장부를 꼼꼼히 작성하던 여자가 아무 이유 없이 자동차를 타고 정처 없이 떠돌 수도 있는 것이고, 여느 사내들의 추근댐을 싫어하던 여자의 집에도 어떤 남자가 2년간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며, 평범한 가정부가 비싼 반지를 선물 받아 소지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개인에겐 자신이 겪은 모든 사건과 인생의 전부를 타인 앞에서 설명해야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관객은 무대 위 인물들과 같이, 그녀를 어떤 ‘전형성’ 안에 가둬버리고, ‘그녀 답지 않은 행동’들에 의문을 품는다. 인간의 삶이란 ‘그저 그럴 수도 있는 것인데’, 논리와 인과와 각자가 프레임화 시킨 카타리나 블룸에 맞춰 그녀의 행동을 재단하고 평가한다.



3. 명예 회복하기

  결국 괴텐이 체포되면서 모든 진실은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단지 한 남자와 하룻밤 ‘다정한’ 관계를 가지고, 탈영병이라고 생각했던 그를 도주시켜준 것 밖에 없는 이 여자는, 순식간에 창녀로, 빨갱이로 낙인찍히고, 어머니까지 잃어야했다. 그리고 혐의를 입은 그녀와, 그녀의 지극히 사적인 인생사, 어머니를 잃는 그 순간까지 대중에게 소비된다. 사과하는 이는 없고, 27년간 성실하게 살아왔던 한 소시민의 삶은 그렇게 무너져 내린다. 그럼 도대체 이 여자는 어디서 자신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야할까?

  결말은 다소 충격적이다. 카타리나는 악의적인 기사를 실어온 차이퉁의 기자 퇴트게스에게 인터뷰를 청한다. 퇴트게스는 자신이 프레임화한 대로 철저히 그녀를 창녀로 소비한다. “섹스나 한판 하자”고 말이다. 그런 퇴트게스에게 카타리나는 총을 쏜다. 단지 우발적이었던 범행은 아니었다. 네 발을 쏜 후, 그녀는 천천히 한 발을 더 쏘았다.

  연출자는 결말에 대해 카타리나가 언론과 대중이 만들어낸 진짜 마녀, 자본주의의 상품이 되었다고 평한다. 그러나 카타리나 블룸은 퇴트게스를 단죄함으로서 마지막 남은 명예를 지킨 것은 아닐까. 마지막 장면의 카타리나는 취조실에서 당당하다. 억울한 혐의를 입었던 괴텐 사건 때와는 달리 명확히 범행을 진술한다. 네 발이라고 말한 뒤 정정하며 혹은 다섯 발이었을지도 모른다며, 범행 사실을 올곧게 고백한다. 지금까지의 진술이 한 치의 거짓이 없었음에도 자신을 믿지 않았던 검사들, 그리고 어쩌면 그녀를 의심했던 관객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완전히 주장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마지막 남은 명예를 지키는 것이 또 다른 폭력으로 인한 것이라는 씁쓸함은 감출 수 없지만 말이다.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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