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유산진흥원] 조선의 정치, 문화 중심 북촌

글 입력 2017.06.21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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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은 청계천과 종각의 북쪽에 있는 동네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조선시대 왕족이나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습니다. ≪매천야록≫권1 상에 의하면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조선 600년 정치 문화의 중심, 북촌의 유적지를 찾아가 해설을 듣고 주변을 환경정화 합니다.


이동경로
안국역 3출구 → 박규수 집터 → 제중원 터
백송 → 인촌 → 김성수 가옥 → 유심사 터
석정보름 우물 터 → 중앙고등학교, 노백린 장군 집터
맹사성 집터 → 장원서 터 → 서울교육박물관 (정독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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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 선생 집터

안국역 2번 출구, 헌법 재판소 내에 위치
헌법 재판소로 가는 길 북촌로는 북악산 남쪽 계곡의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해방 뒤 에 반듯하게 만들어 놓은 찻길입니다.

헌법 재판소 자리는 원래 영조 때 풍양 조씨 세도의 기반을 만든 중신 조상경의 집터였습니다. 이후 100년 사이 이 집터의 조씨 터전에서 판서와 정승 수십 명이 배출되어 '7대 판서 터'라고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재동은 세조가 계유정난 때 김종서, 황보인 등 단종을 받들던 중신들을 참살 했던 비극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때 흐른 피를 재로 덮었다고 해서 잿골, 한자로 재동이란 지명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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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실린 사진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선생의 집터가 있던 자리임을 알려주는 표석이 있고 옆에 보이는 백송은 박규수 대감의 마당에 있던 것인데 박규수 선생님이 중국에 사행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것입니다. 박규수 선생님은 중국으로의 두 번의 사행을 통하여 중국의 양무운동의 영향을 받아 북학을 계승하고 또 개화사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박규수의 개화사상은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꿈꾸었던 젊은 개혁가들의 사상적 뿌리가 되어 개화운동의 선구자인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등을 배출 하였습니다.

박규수 사후 집터에 근대 우편제도를 도입한 개화파 홍영식이 집을 지어 살았는데 김옥균과 주도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살해당한 후에는 역모자들의 거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 집주인이 된 경무사 안경수 또한 역모죄로 처형되었고 이후 이호준과 양아들 이완용이 1900년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제중원 터

1885년(고종 22)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처음에는 왕실에 속해있다는 의미가 강한 광혜원에서 제중원(모두에게 유익한 집)이라는 즉, 모든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긴 명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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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조선 정부는 1876년 문호개방 이후 총체적 근대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때 의료 근대화에도 주목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서양의학 교육의 필요성이 거론되었고 선교사 매클레이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때 갑신정변이 일어났는데,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찔려 다쳤을 때  선교사 겸 의사인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하여 완치시킴으로써 서양의학의 우수성을 알리게 됩니다. 결국 조선 정부는 국립병원의 설립을 승낙했습니다.

건물은 홍영식의 집(역적이 되어서 국가 재산이 되어 있었음)을 제중원 부지와 건물로 사용하도록 했고, 홍영식의 집은 넓은 한옥이었기 때문에 진찰실, 수술실, 입원실, 대기실 등 기본 시설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제중원은 첫 1년 동안 1만460명의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일반 백성을 중심으로 아래로 걸인, 나병 환자로부터 위로는 궁중의 귀인까지 조선의 전 계층을 망라하여 진료했다고 합니다. 제중원의 환자들이 늘어나자 조선 정부는 제중원을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자리)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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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의 근대 인재 양성 프로젝트로 1886년 3월 29일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의과대학인 '제중원의학당'이 문을 열었으나 1890년 무렵 조선 정부의 재정난을 비롯한 문제점으로 의학교육이 중단되고 졸업생은 배출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국인 에비슨에게 이관했는데 에비슨은 1904년 병원을 이전하여 남대문 밖 복숭아 골에 현대식 건물을 지어 세브란스 병원이라 명했습니다. 1905년에서야 대한제국 정부는 제중원의 땅과 건물을 되찾았을 수 있었습니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서양의학을 능동적으로 도입했다는 것과 우리나라의 근대 의료사의 출발점이 되어 한국 의학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 옛집

인촌 김성수 1891~1955 (고종 28)
소재지: 종로구 계동 132번지

김성수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나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행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호남의 거부의 집 아들로 부유하게 자랐습니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어요. 1919년에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습니다. 물산 장려 운동에 참여 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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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 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공경하여 높이 받듦)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양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했어요.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습니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에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지난달 대법원은 인촌 김성수 선생이 일제 강점기에 일간지에 징병을 찬양하는 글을 기고한 행위 등을 친일 행위로 최종 인정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인촌을 기리는 유, 무형 기념물폐지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석정보름 우물터

서울시 상수도시설이 도입되기 전 우물은 주된 생활용수 공급원이었습니다. 석정보름우물도 북촌 주민들의 중요한 음수원이었습니다. 석정보름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났었고 이 우물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 다는 속설이 있어 인근 궁궐 궁녀들도 몰래 떠다 마시며 아이 낳기를 기원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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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온 우리나라 최초의 중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에 숨어 살면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 우물물로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도 이 지역에서 많은 사목기간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하였습니다. 천주교 박해당시에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갑자가 물맛이 나빠져서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계원 노백린 장군 집 터

중앙 고등학교 본관 우측 하단에 위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등을 역임
노백린 장군(1875~1926)이 1910년대 미국으로 망명 할 때가지 거주하던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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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린 장군은 황해도 송화 출신으로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 상경해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게이오의숙에서 수학하고 세이조 학교를 거쳐 1899년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00년 귀국 후 육군 참위에 임관되어 무관학교 교관과 교장을 역임하며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군대 해산 후 고향에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국권 상실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1914년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창설한 대조선 국민군단에 관여하다가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언론활동에 종사하였습니다.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군무총장에 선임되자 1920년 캘리포니아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한 뒤 상해로 건너가 임시 정부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임시 정부 군무총장과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심장질환으로 1926년 1월 22일 상해의 한 양옥 단칸방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대한민국 창공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노백린 장군은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한인 비행사 양성소를 창설하고 한인 비행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 천황궁 폭격을 목표로 전투비행 훈련에 전념하도록 했습니다. 1923년까지 총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국내 비행가를 양성했습니다.



중앙 고등학교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기호지방의 우국지사들에 의해 설립된 기호학교가 1910년 흥사단에 설립한 융희학교를 합병하여 설립된 학교입니다. 또한, 우국지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호남, 교남, 관동 등의 학회가 운영난에 빠지자 모두 통합하여 중앙학교로 이름을 개칭했습니다. 1915년 김성수가 인수하여 1917년 계산 언덕에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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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교사는 2층 벽돌집이었고 1934년 본관이 화재로 소실되자 1935년 고려대학교 본관과 조선일보 사옥을 설계한 근대건축가 박동진의 설계로 1937년 9월에 준공하였습니다. 본관은 학교 정문에서 바라볼 때 정면에서 세워졌으며, 석조 콘크리트 철근 2층의 근대식 건물입니다. 좌우가 대칭되는 H자형 평면의 중앙에는 중세시대 고딕 성관풍의 4층탑을 두었습니다.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한 중앙고등학교는 개교 110주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사학 명문학교입니다.



맹사성 집터

맹사성(1360~1438)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최영의 손녀사위이고 황희, 윤회, 권진 등과 세종의 측근이었습니다.
 
1386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1408년 대사헌으로 역모 사건을 취조 중 태종의 부마이자 조준의 아들이 조대림 고문사건으로 왕족을 능멸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될 뻔 했으나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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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스승이었고 세종 13년에는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평소에는 하인이나 노비에게는 관대했지만 중요 직책의 사람들에게는 엄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늘 녹미(봉급으로 받은 쌀)만으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음악에도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습니다.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과단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장원서 터

표석위치: 정독도서관 왼쪽 담장 아래로 난 화개6길 끝나는 지점.
 
궁중에 꽃이나 일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던 장원서는 과원색, 생과색, 건과색, 작미색, 장무색 등의 실무 부서를 두어 업무를 나누어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과원색은 장원서에 속한 각종 과수나무와 화초를 재배하는 일을 관장하였는데, 재배할 과수나무와 화초는 각처의 동산직이 채납하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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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색은 배, 밤, 은행, 석류, 유자 등의 생과일을 종묘에 천신하고, 탄일과 절일에 진상하는 일을 관장하였습니다. 건과색은 곶감, 호두, 잣, 대추, 밤 등의 건과를 진배하는 일을 맡았고, 작미색은 장원서에 공납된 미곡의 사용을 담당하였으며, 장무색은 장원서의 서무를 담당했습니다.

장원서에서는 궁중에 각종 과일을 공급하기 위해 궁중뿐만 아니라 용산, 강화, 남양, 과천, 양주, 고양, 부평 등지에 과수원을 두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과일을 궁중에 납부하였습니다.





한국문화유산진흥원에서는
소공재 봉사활동을 지원하고
회원들 간의 친목도모와 함께
자체 역량강화를 위해서
「소공재 학습동아리」를 발족하였습니다.

개강: 2017년 5월 6일 토요일 15:00-17:00
장소: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5길 48(화동)
정독도서관 2동 3층, 세미나 1실

회원 특전
① 참여시간에 따라 봉사활동 인증, 참가비 무료
② 전체 21회 강좌 중 15회 이상 참여시 수료증 수여
(차후 평생교육과정과 연계 예정)


5/06 (토)
15;00~17:00

우리의 문화유산 어떻게 지킬 것인가?
(독일의 문화재 보호정책의 시사점을 중심으로)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원장
안두순


5/20 (토)
18:00~20:00

서울의 근대화 과정, 어제와 오늘

전 서울시 부시장
김상범


6/03 (토)
15:00~17:00

조선말기 국내외 정세와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정책팀장
최운도


6/17 (토)
18:00~20:00

6.25전쟁, 이름 없는 영웅들

가톨릭 대학교 교수
김세원


7/01 (토)
15:00~17:00

겸재 정선이 그린 서울

한국민예미술연구소 소장
허균


7/15 (토)
18:00~20:00

조선말기 서울의 모습

한국건축학 교육인증원
원장 신범식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엮음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소공재 소개

'소통, 공감, 재미'의 머리글자를 딴 '소공재'는 우리 문화유산을 통해 소통하며 공감을 나눔으로써 재미를 추구하는 사단법인 한국문화유산진흥원의 산하 봉사단체입니다.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애호사항을 고취하고 회원 간의 친목과 이해를 증진시키며 문화유산 진흥을 위한 봉사활동을 통해 공익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ARTINSIGHT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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