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렇게 사람은 사랑을, 영화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 [시각예술]

둘은 이미 라스베가스를 떠났네
글 입력 2017.06.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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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못했다. 물론 휴일이 생산적으로 써야 할 필요가 없는 날인 것도 알고 있지만, 여태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하다 못해 끄적이던 글까지 잘 써지지 않은지가 좀 됐다. 잘은 못써도 쓰기가 고민스러웠던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날이 갈수록 뭔가가 불안한 마음에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하루는 똑같이 흘러간다. 별 문제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아침엔 운동을 하고, 일정에 맞춰 제 때 뭔가를 하고도 있다. 사람들에게도 기분좋게 맞춰줄 수도 있다. 특별하게 나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기도, 무엇을 하기도 싫은 때가 와버리고 말았다. 한번도 이렇게까지 불안한 적은 없었다. 지쳐도 할 일은 해왔고 균형을 잡아왔다. 아주 힘들 때는 오히려 더 오기로 기운이 나곤 했다. 그런데 의욕이란 녀석이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건 처음이다. 이상한거다. 뭔가 자꾸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가 없다.

  변명같이 꺼내들었다. 내 자신이 쓰레기 같이 느껴질 때, 약한 모습으로 허덕이고 있어서.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말았다. 나에게 뭔가 대단한 무엇이라도 있긴 했던걸까. 동지애처럼 골라잡았다. 곧 죽겠다고 날을 잡아 놓은 알콜중독자와 그런 그의 곁을 지켜주는 라스베가스의 한 창녀라고.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걸까. 대리만족을 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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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괜히 심장이 답답하다. 쉴 새 없이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음악이 나온다. 화면은 어둡고 흔들거린다. 알콜중독인 벤이 술을 한순간도 놓지 못하는 것처럼 영화도 음악을 놓지 못한다. 같이 취한 것처럼, 같이 어지러운 것처럼. 음악이 나오지 않는 순간은 손에 꼽는데 모두가 그가 사랑에 빠진 새라와의 순간들이다. 가장 처음은 라스베가스에 처음 도착해 술을 마시면서 운전하다 하마터면 칠 뻔하면서 새라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 그냥 자기랑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하다가 잠들어 버린 때. 그녀를 잊지 못하고 다시 만나 저녁을 먹자고 할 때. 그녀의 집에서, 여행을 가서 함께 한 모든 시간들. 심지어 자신이 죽음이 머지 않은 그 순간 그녀와 함께 할 때 영화에서는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 시끄럽던 그의 머리 속이 잠재워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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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은 새라를 천사라고 부른다. 그는 왜 새라에게 빠지게 됐을까. 모두가 그를 눈 앞에서 치워버리려 한다. 새라는 그러지 않았다. 혹자는 욕을 하고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자꾸 술을 마시면서 많은 사람에게 치근덕거리고 일상생활이 제대로 불가능한 그를 온갖 가게에서 보내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가끔 걱정이나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다. 흔해빠진 얘기지만 술을 줄이는 게 좋겠다고도 한다. 젊은 사람이 뭐가 그렇게 고민이냐고도 한다. 그래봤자 벤을 진짜 궁금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힘들어보이면 힘내라고 하는 말 같은 거다. 엄청 힘든 사람에겐 힘 내라는 말이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술을 하도 퍼먹는 사람에게 술을 줄이라는 말도 역시 별로 도움은 안 될 거다. 어느 선을 넘어가면 이미 그 말은 인사치레에 준하는 것 뿐이다. 새라는 그에게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사실을 얘기했다. 빨간 불이었다고. 나는 길을 걷고, 당신이 탄 차는 멈춰야 되는 때라고. 차에 치일 뻔 하고도 다짜고짜 화를 낸게 아니라 차근차근 설명을 해줬다. 말하지 않아도 나오는 그녀의 매력에 반했을 수도 있지만, 오랜만의 일 아닌가. 그에게 마치 자기는 그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듯 명령과 욕설, 의미없는 동정과 업신여김이 아니라 첫 만남부터 동등한 위치에서 설명이자 대화를 해준 사람은 새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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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술만 먹으면 여자들에게 치근덕거리곤 했지만 사실 여자한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술과 여자에 빠진 건 아무래도 정통 한량에 잘 어울리는 거지만 뭔가 빈 자리를 채우고 싶었던 것 같다. 새라에겐 돈을 얼마 만큼 줄테니 자신과 자달라고 했지만 막상 그는 돈을 받고 자려고 하는 그녀를 멈췄다. 곁에서 이야기 좀 하고 들어달라는 거였다. 라스베가스에 오기 전 그는 가족사진이며 뭐며 모두 불태웠다. 또다른 창녀에겐 술을 마셔서 아내가 떠난건지, 아내가 떠나서 술을 마시게 된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드러나지 않지만 그는 상처입고 외로운 사람인 것 뿐이다. 처음엔 술을 마시면서 고통을 풀어버릇 했고 지금은 술이 그를 마시고 있을 뿐.

  그 얘기를 담담히 들어준게 새라였다. 새삼 말을 서로 들어주고 이야기한다는 게 얼마나 따뜻하고 중요한 의미인지. 자신은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니 식욕 따윈 전혀 없으면서도 그녀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려던 것, 그 날 저녁의 눈빛은 술을 마셔서 나온 풀린 눈빛이 아니었다. 왜 술을 그렇게 먹냐는 그녀의 질문에 첫 데이트인지, 마지막 데이트가 될 지부터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말했듯이 새라는 그에게 술을 깨고 또렷한 정신을 주는 사랑스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 준 선물은 술을 담아둘 수 있는 휴대용 술통이다. 그에게 술을 덜 마시라고도 안했고 그냥 손 다치지 않게 여기다가 먹으라고 하는 그녀야 말로 그를 그대로 받아들여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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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라 역시 창녀 생활에 지쳐있던 상황이었다. 그녀의 생활은 맞춤형 공연이었다. 노련하게 매번 다른 선호를 맞추느라 그녀는 변신하고 기대에 부응해야했다. 포주에게도 물론 마찬가지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도 같지만 돈을 벌어오지 않으면 빰을 날리고 상처도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직업적인 면으로만 상상해봐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게 보인다. 돈을 벌어야 하니 응하겠지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돈을 받는 대가로 정말 뭐든지 다 해야 한다. 유독 과격한 사람을 만나면 눈에 멍이 들고 몸에 상처가 나도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누군가 만나서 혼자를 벗어나고 싶어도 아마 그녀의 직업을 알고 나면 남자는 고민에 빠지고 말테니까. 악순환이다. 그런 여느 날, 그녀에게 돈을 주고도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이야기나 들어달라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녀의 생활에서 좋은 날은 없었는데 그녀는 그렇게 신나는 마음에 시간이 지났는데도 더 오래 남아있었다. 힘들던 때는 지나간 것 같다고, 내 삶은 좋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는 벤과 있을 때는 변신할 필요도 없고 공연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정말 보통 커플처럼 저랑 저녁 먹을래요, 부끄러워하며 물어보는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게다가 그녀에게 너무나 아름답다고, 천사같다고 진심으로 말해주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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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둘의 사이가 정말 보통 커플같았던 건 아니다. 그들에게는 각각의 타협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다. 벤에겐 술을 마시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의사를 찾아가보라고 말하지 않는 것. 새라에겐 계속 창녀생활을 하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과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는 것. 이미 시작부터 알고 있던 문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벤과 새라의 모든 데이트는 벤이 손에서 놓지 않는 술로 망가졌고 사랑이 깊어질수록 아파하는 벤의 모습에 새라는 결국은 의사를 보러가라는 얘기를 꺼낼 수 밖에 없었다. 새라가 생계를 위해서 다시 창녀생활을 하는 것에 벤도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넘기지 못했다. 그녀에게 귀걸이를 선물하면서도 다른 남자 품에서 있는데 도움이 될거라고 말하면서 상처를 주거나, 다른 창녀를 집에 끌고 들어오기까지 했다. 벤이 쓰레기짓을 하기도 했지만 어떤 마음일지는 떠올랐다. 그녀한테 가지 말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이 너무 싫었고, 다른 창녀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을거고. 점점 피폐해져가는 모습으로 그녀를 울리기 싫어서 일부러 모질게 떠나려고도 한 것 같고. 이상하게도 그가 못된 짓을 하면 그 이유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너무 이해가 안가는 점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는 미워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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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에 이해나 교훈을 바라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고,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어떤 고통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거나 고쳐쓸 수 없다는 교훈을 주려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묵었던 숙소 주인 말마따나 그녀가 자주 본 인생 종친 사람들 여럿 중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성적으로 보면 새라가 그렇게 사랑하는 벤이 술로 정말 죽어가는 걸 보면 병원에 데려갔었어야 했다. 벤 역시 그렇게 사랑하는 새라가 더 이상 이름 모를 남자들에게 상처 입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아니 적어도 혼자라서 슬퍼하지 않도록 살아남아서 곁에 있어주었어야 했다. 결국은 풀리지 않는 숙제를 술로 풀으면서 그녀에겐 온갖 술 냄새가 풍기는 사랑만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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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그녀는 술 냄새가 풍기든, 싸움이 붙어 피 냄새가 나든,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서로의 불완전한 모습, 바뀌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맞춰서 지내듯, 이 둘도 여느 연인과 다르지 않았을 뿐이다. 맞춰야 할 부분이 술과 성매매라는 조건, 너무나 극단적이라 그렇지, 우리도 그냥 저 사람은 그렇다 하고 맞춰주는 수많은 부분들이 있지 않았던가. 그 또는 그녀는 해산물/고기/커피를 싫어해, 치약은 꼭 중간부터 짜 버릇해, 양말을 뒤집어 두고 다녀, 지갑이나 핸드폰을 잊어버리고 돌아다녀, 어떤 버릇이나 트라우마, 질병 같은 것, 이런 수많은 완벽하지 못한 모습도 그나 그녀를 이루는 특성이기에. 귀찮아도 우리는 그 관계를 이어오기 위해, 그 소중한 사람을 위해 맞춰오지 않았던가. 중간중간 새라가 혼자 이야기하는 부분을 들어보면, 처음 봤는데도 낯설지 않고, 안하던 짓인데 이름을 가르쳐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정말 사랑했다고 연거푸 말하는 걸 보면. 그 역시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녀를 맨 정신에 보고서야 숨을 거둔 걸 보면. 그와 그녀의 사랑에 먹먹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그 둘은 자신들이 처음 만난 라스베가스는 진작 떠나있었다. 힘들게 하루를 연명해야하는 곳이자 죽음만을 위해 찾아온 곳. 살아있는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라스베가스는 이미 다른 의미가 되어있다.
 
  이 영화를 왜 보고 싶었을까. 위로도, 대리만족도 맞다. 수많은 소중한 사람을 이해가 가지 않아도 함께 했듯, 나는 나의 이해가지 않는 모든 모습 역시 미워할 수는 없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인색한걸까 기대가 많은걸까. 아직도 어려운 건가 싶고, 되려 시간이 갈수록 어려운 것도 싶고.





* 새라는 머리를 묶었을 때와 풀었을 때의 느낌이 정말, 다르다.
* 영화의 느낌을 살리는 일등공신은 음악과 영상이었다. 처음 ost를 접했을 때는 연주곡들도 좋았고 Sting의 < My One and Only Love >가 더 듣기 좋았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 Angel Eyes >가 더 기억에 남는다. 술에 취해 운전을 하는 벤의 시야를 보여주듯 적당히 어둑어둑하고 군데군데 드문드문 끊겨있는 영상 역시. 워낙 술을 달고 다녀서 그런지, 영화를 보고 나면 한 잔 한 느낌이 난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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