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記

#12
글 입력 2017.06.2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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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기, 힐링(Healing)


1. 좋아하는 식당, 눈여겨보던 식당에 가서 밥 먹기.
2. 읽고 싶었던 책이나 낙서장 챙겨서 좋아하는 카페에 가기.
3. 돈, 일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을 잊어버리고 시간 쓰고, 집에 돌아가면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자기.


 내가 한계에 몰려 무기력감에 지쳐 무너질 때면 사용하는 하나의 매뉴얼이다. 금요일 일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씻으며 최대한 잡념들을 씻겨 보낸다. 그리고 컴퓨터, 아니면 침대에 드러누워 핸드폰으로 지도 앱을 켜 동선을 만든다. 멀지 않게, 최대한 가까운 지점으로. 다만 집에서 출발하는 거리는 1시간 정도로.


 사람은 지치기 마련이다. 무기력함을 게으르다 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계가 아닌 이상 체력이나 정신의 소모가 있다. 회사가 아무리 좋다한들, 학교가 아무리 좋다한들 사람 사이 관계에서 소모되는 감정들은 있을 수밖에 없고, 어느 순간 방전이 되어버린다. 지치고, 외롭고, 힘들고. 그럴 때 잠시라도 딱 주말 2일 중 하루라도 치유의 날이 필요하다. 요즘 트렌드라는 힐링이 좀 필요하다. 사람이 차라리 기계였다면 등에 달린 충전 포트에 충전기라도 꽂겠지만 아니니까. 세상이 좀 이상하다. 잘 사는 사람들은 가만있어도 부를 축적하고 못 사는 사람들은 한 달을 버틸만한 돈을 벌며 그들의 삶을 동경한다. (물론 자수성가니 노력해서 위로 올라간 소수가 있기야 하지만 말처럼 소수니까.) 소소하지만 위의 순서대로 하루 정도 치유의 날을 가지는 게 삶에서 자주 필요하다.

 집에서 출발하는 거리는 1시간 정도 걸리는 게 좋다. 버스, 지하철 중 편한 것을 택해 그 시간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또 듣고. 한 곡만 반복해도 좋고, 그러면서 바깥을 한 번 보면 좋다. 평소에는 바빠서 그저 앞만 보느라 보지 못했던 계절의 풍경이나 사람들의 모습들. 1시간이 꽤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 도착하면 그대로 정해둔 식당으로 가서 조용히 식사를 한다. 핸드폰을 보면서 조용하거나 시끄러운 주변을 살피며 밥을 먹는 일. 평소 시간에 쫓겨 급하게 욱여넣고 좋아하지 않아도 억지로 먹고 분위기를 맞춰줘야 했던 때들을 등지고 오롯하게 나의 시간과 맛과 느낌을 먹는 일.


 느린 식사를 마치고 나면 나는 항상 이 말을 잊지 않는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상냥한 한마디가 그리워지는 때가 있다. 사무적이고 딱딱한 관계 속의 의미 없는 말들은 지겹다. 저 한마디에 웃는 식당 직원을 보면 괜히 내가 더 기분이 좋아진다. 일하는 거 힘들 텐데. 이제는 발을 옮겨 카페로 간다. 가방에는 미리 챙겨 온 책이나 혹은 낙서장. 이 날 만큼은 다이어트니 뭐니 다 미뤄둬야 한다. 치유하는데 이런 곳에 괜한 스트레스받으면 의미가 희석되니까. 카페에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를 시킨다. 음료를 끼적끼적 마셔가며 책을 읽거나 그리고 싶은 걸 손가는 대로 그리다 보면 시간이 조용히 흘러간다. 정말 이 순간만큼은 돈, 일, 인간관계 모든 것을 잊어버리도록 노력한다. 노력하자. 나만, 철저하게 이기적이게 나만을 위한 시간.

 
 저녁이 되기 전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계산을 하며 다시 인사를 한다. "안녕히 계세요." 상냥한 말을 함으로 상냥함을 나도 느낀다. 짧지만 강하게. 어스름하게 밤의 커튼이 내리기 전에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며 다시 풍경을 되새기고 오늘 하루 속의 주인공이 나임을 상기한다. 아, 그리고 카톡이나 연락도 이 날 하루만큼은 무시하자. 알림은 꺼두기. 집에 도착하면 기분 좋은 나른함과 피곤함이 몰려온다. 평일에 느끼던 묵직하고 불쾌한 피곤함과는 확연히 다른 피곤함.


 마지막으로 따스한 물아래에 서서 하루를 깨끗하게 정돈한다. 오늘 하루의 느낌, 기분들을 맨살을 쓰다듬는 물의 부드러운 손길 속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상쾌한 기분으로 나와 이불속으로 들어가 꾸물거리다 잠들면 치유의 날은 마무리된다. 적어도 다음 한 주를 버틸 수 있는 에너지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이러한 과정에도 금전적인 부분이 들어가긴 하지만, 너무 지친 나를 위해서 세 가지 중 하나 만이라도 하루 종일 꼭 해보자. 빠른 세상만큼 빠르게 소모되는 나의 모든 것을 채워주는 시간을 가져보자. 타인, 타인의 시간 속에서도 늘 언제나 나는 소중하다.


[白(HAYANG)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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