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속 '오아시스'의 의미 [영화]

글 입력 2017.06.19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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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아시스'는 2002년도 작품으로 이창동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오피니언 소재로 쓰고 싶은 영화는 정말 많았지만, 굳이 '오아시스'라는 영화를 선정한 이유는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오아시스'의 의미가 내게 너무나도 와닿았기 때문이다. '오아시스'하면 쉽게 낙원, 이상향과 같은 환상적이고 현실과 단절된 독립적인 성격의 공간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이 이야기하는 ‘오아시스’는 조금 다르다, 그는 현실의 한 지점으로서의 ‘오아시스’를 이야기한다. 그의 이런 시각은 종두와 공주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스스로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오아시스」 줄거리 요약

 
  뺑소니로 교도소에서 형을 살다가 나온 종두(설경구)는 한 겨울에 반팔을 입고 있다. 집에 가도 아무도 없고,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종두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어머니 패딩을 산다고 돈을 다 써놓고서는 고기집에 들어가 무전취식을 한다. 결국 경찰서에 끌려간 종두 앞에 그의 남동생이 나타난다. 집에 돌아가지만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다. 다음날, 종두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미안한 마음에 피해자 가족들의 집을 찾아간다. 피해자 가족들은 당신이 어떻게 여기를 찾아오냐며 화를 내고, 종두는 그런 가족들의 어깨 너머로 뇌성마비 장애인 여자, 공주(문소리)를 보게 되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공주를 그 집에 남겨두고 이사를 가고, 종두는 그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다시 공주를 찾아간다. 종두는 그녀가 예쁘다고 생각했고, 만져보고 싶었다. 종두가 혼란스러운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자, 공주는 두려움에 쇼크를 일으키고 기절하고 만다. 종두도 그런 자신의 행동에 놀라, 자신의 연락처를 남기고 그 집을 떠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괴로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종두에게, 어느 밤 공주의 전화가 걸려온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종두가 그녀의 방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공주는 자신의 방에 걸려있는 오아시스 그림 위에 비추는 그림자가 무섭다고 이야기한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둘만의 순수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종두와 공주는 드디어 첫 잠자리를 가지게 된다. 이때, 공주의 오빠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야 만다. 강간범으로 몰리게 된 종두와 이를 설명할 수 없는 공주. 자신의 방에서 죄책감에 떨고 있는 공주와 파출소에 갇혀 있는 종두. 그 때, 종두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가고, 그는 파출소를 탈출해 공주의 집으로 달려간다. 그가 파출소를 탈출해서, 공주의 집까지 달려가, 그가 기껏 한 일은 그녀의 창가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나뭇가지들을 모두 잘라내는 일이었다. 그런 종두를 향해 공주는 라디오의 볼륨을 최대한 높여주었다. 결국, 나뭇가지들을 모두 잘라낸 종두는 수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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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와 종두 가족의 '아이러니'

 
   종두의 가족들은 그의 무능력하다며 싫어한다. 그 중에서도 종두의 형이 유별나다. 형은 종두에게 네 행동에 책임을 져라, 네 밥그릇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하라며 어른스러움을 강요한다. 비록 그들의 언행이 폭력적이라고는 해도, 실제로 극중 종두의 모습은 천진난만해 보였고, 사회성이 결여된 모습들을 많이 보여줬기에 가족들의 태도에 수긍이 갔다. 나중에야 밝혀지는 내용이지만, 사실 뺑소니를 친 사람은 종두가 아닌 종두의 형이었다. 형은 가족이 있고, 직업이 있었다. 반면에 종두는 교도소에 들어간다고 해서 잃을 사회적인 지위나 자산이 아무것도 없었다. 종두는 그런 형을 위해 희생된 것이다. 사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못 진 사람은 다름이 아닌 종두의 형이었다. 종두는 그들에게 존재론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자,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을 회피한 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강요하고 강조하는 아이러니, 그것이 종두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인 것이다.
   공주의 가족(오빠와 그의 아내)은 종두가 그들에게 미안하다며 찾아갔을 때, 어떻게 사람이 이리 뻔뻔할 수 있냐며 윤리적인 것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의 아이러니는 금방 탄로 나고 만다. 공주의 오빠는 뇌성마비 장애인인 공주를 이용해서 장애인 임대주택을 구한다. 공주는 여전히 낡은 집에 방치하고, 옆집 사람들에게 매달 20만원씩 주면서 공주에게 밥을 차려주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옆집 사람들은 공주에게 무관심하고 급기야 공주가 있는 집에서 성관계를 가지기도 한다. 그의 이런 속물적이고 비윤리적인 모습, 아이러니는 영화 후반부에도 드러난다. 공주와 종두가 성관계를 맺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는 한껏 윤리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윤리적인 것을 빌미로 종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가 원한 것은 합의금이었다. 사실 그에게도 공주는 가족이라는 관계에 종속되어 있을 뿐, 인격체로 존중하기 보다는 그저 소모품 정도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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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공주는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그녀의 장애와 비정상성은 가시적이다. 그녀는 일반인처럼 말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휠체어를 타야지만 외출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쉽게 판단하고 거부하며, 혐오하고 약자로 규정한다. 반드시 ‘뇌성마비’가 아니더라도 ‘장애’는 이와 비슷한 성격들을 가진다. ‘장애’는 주로 ‘활동’에 제약을 수반한다, 그것이 물리적인 활동이든 언어활동이든. 이런 제약은 차별과 억압의 계기나 근거가 된다.
   종두 또한 비슷하다. 공주가 물리적인 차원의 ‘활동’에 제약을 가진 사람이라면, 종두는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제약은 없지만 사회적인 차원의 ‘활동’에 제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전과자이기 때문에, 구직 활동을 포함한 많은 것들을 잘 해내지 못한다. 형이 구해준 중국집 배달일도 해내지 못하고, 이 때문에 면허가 정지되어서 운전도 하지 못한다. 이런 사회적 제약은 종두를 끊임없이 따라다닌다. 필자는 종두가 ‘사회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둘은 사회에서 배척되고 억압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사회적 기능을 해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사회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그들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받고, 소외당한다. 소외당한 그들은 도구로 전락하고, 이용당하고, 버려진다. 그런 종두와 공주가 서로를 사랑하고, 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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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장애 - 건전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 장애되는 사태를 넓게 사회적 장애라 한다. 사회적 장애를 일으키는 요인으로서는 실업, 노령, 질병, 심신장애, 화재 등 직접생활 장애를 유발하는 사고적 요인과 빈곤, 차별, 소득 등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생겨나는 모순으로서의 사회적·경제적 요인이 생각된다. 양쪽 다 자립적인 사회생활의 영위와 정당한 사회생활의 충족을 손상시키는 사태를 갖고 오는 것으로 사회복지의 대상으로 생각되어야 할 문제를 갖고 있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사회적 장애 [social handicapped] (사회복지학사전, 2009. 8. 15., Blue Fish) 
 

‘오아시스’

 
   누군가 사랑은 그 자체로 판타지라 했다. 각박하기만 세상 속에서 그건 어쩌면 신기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겐 종두와 공주의 사랑이 그러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이, 내게는 마냥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공주는 ‘오아시스’ 그림 위의 비추는 그림자가 무섭다고 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는 쉬는 곳이고, 낙원이고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어쩌면 공주는 그림자 밑에 있기 보다는 똑같이 사막으로, 세계로 나아가는 주체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그림자 밑에 있을까봐, 그게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종두는 나무를 잘라, 그림자를 없애주었고, 공주는 창문을 열어 라디오의 볼륨을 올렸다. 그게 그들의 최선이었다. 그림자가 없어진 오아시스는 이제 사막 위의 한 지점으로, 특수성을 잃고 편입되고 만다. 이렇게 표현하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것은 공주와 종두의 세계가 다른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오아시스’도 결국은 사막 위의 한 지점에 불과하다. 사막과 완전히 구분되어진, 독립된 환상적인 공간이 절대 아니다. 사랑이 삶 때문에 힘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들이 그걸 모르고 순수했기에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다. 그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사랑했기에 아름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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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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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오아시스
    • 이해력 부족한 저에게 정말 좋은 리뷰 입니다

      얼마 남지 안은 2021년 행복 하고 즐겁게 보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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