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에의 욕망과 고뇌, 내 이름은 빨강 [문학]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글 입력 2017.06.18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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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그리고 오르한 파묵.



 굉장히 익숙한 제목과 작가임에도 그의 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3세계의 유명한 작가가 썼다는 점이 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터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면 6.25 참전국, 형제의 나라 정도일 뿐, 일전에 터키에 관한 모든 것을 접해본 적이 없어 그곳엔 어떠한 문화의 세계가 드러나는지 거의 모르고 있었다. 아마 동양과 서양이 동시에 존재하는 나라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눈으로 본 터키란 나라는 종교적 신성성, 깊은 문화적 자존심, 그리고 흔들리는 예술적 가치관이 있었다. 함축해 말하자면 이 소설의 주제는 문명의 갈등과 충돌이라 할 수 있겠다. 오르한 파묵은 회화 기법이라는 소재를 통해 동양과 서양이 문명이 충돌하는 시점의 모습들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이 소설은 시선을 나무에 두냐 숲에 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받은 작품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에 집중하여 세세하게 읽으면 지루할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부분이 아닌 전체로 보는 것이 유기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오르한 파묵이 소설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각도로 풀어나간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느꼈다.
 또한 작가는 의인화된 사물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서술하기도 했다. 죽은 사람이나 늙은 개처럼 글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각자 할 말이 있었다. 이는 사실 주된 핵심 사건이라기보다 주변부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한 요소로 충분히 작용할 수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단서들이 하나하나 모여 중심 사건에 대한 배경지식을 형성하게 했다.

 작가는 모든 사물에게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현 시대와 과거의 사상을 이 책으로 인하여 이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터키가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듯,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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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이것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죽어 있는 시체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면 독자는 ‘도대체 누가 살인자인가?’ 라는 의문을 안고 집중하게 된다. 굉장히 신선했던 첫 전개에 놀라며, 중반부로 가서 나타나는 각각의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연관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이해하기 힘든 전개에 진이 빠지기도 했다.
 표면적으로는 추리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면적으로는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과 양식 속에서 갈등하는 화가들의 존립과 고뇌,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이 소설.

 또한 ‘사랑’이라는 주제도 빼놓을 수 없이 대단한 분량을 자랑한다. 이 책은 곧 카라와 세퀴레의 연애 소설이기도 했다. 두 이야기가 하나의 영역인 것처럼 혼합되는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요소가 하나로 연결된다. 연애담처럼 느껴질 때 쯤 살인자의 독백이 흘러나왔다. 그가 엘레강스를 죽인, 죽여야만 했던 이유를 서서히 풀어놓는다. 이에 나는 저자가 살인, 예술, 사랑을 통해 엮어내려고 한 하나의 큰 주제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추리해나가며 글을 감상하게 되었다.



1) 스타일과 서명

 소설에서는 대상의 사실적 재현을 중시하는 고대 서양미술과, 대상을 평면적으로 묘사하는 신중심의 페르시아 미술 간 대립과 충돌이 나타난다. 무려 두 권의 분량을 자랑하는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내용 중 하나는 스타일과 개성에 대한 논쟁이다. 최종적으로 어떤 화풍이 자리 잡게 될 것인가에 관한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예술가들은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본인의 정체성에 관해 어떤 고민들을 했을까.

 이 문명의 충돌은 새로이 알게 된 베네치아 화풍과 전통적 세밀화 기법 사이에서의 혼란을 발단으로 하며, 세상을 인식하는 전혀 다른 시각차에서 기인한다. 이는 종교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신이 내려다본 것을 그리느냐, 아니면 사람이 보는 그대로를 그리느냐를 다투고 있다. 즉, 신 중심이냐 인간 중심이냐 하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 꽤 커다란 단위의 문제였다.

 스타일 논쟁에 이어, ‘서명’의 문제도 함께 나타난다. 여기서의 서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싸인의 개념이다. 소설에서는 이 그림이 내 그림이다 하고 작게 서명을 하는 일을 두고 왈가왈부 하고 있다.

 ‘나비’라는 인물은 개성과 서명에 대해, 스타일이란 불완전함이며 완벽한 그림이라면 서명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또한 결함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도 어리석게 자만하는 인간의 변명이라 보았다. 후대의 사람이 이것이 누구의 그림인지 한눈에 보고 알 수 있을 만큼 독특한 화풍을 지니고 싶어 하는 화가들과 반대되는 입장이다.
 반면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개성에 따라 실력을 평가 받았다. 그림에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는 것을 부정하고 이를 오점으로 여겼던 세밀 화가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세밀 화가에게도 엄밀히 개성이란 것은 존재했다. 어떤 그림이든지 귀와 같은 작은 부분을 소홀히 그렸기 때문에 화가마다 각자 다른 귀를 그리게 되어 그것이 바로 서명과도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작은 부분을 그리는 스타일이 화가마다 다른 점을 고려하여, 미세한 부분에서부터 점점 커져 이것이 하나의 서양이 말하는 하나의 화풍으로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옛 작품을 똑같이 모방하고 익숙한 화풍을 오래도록 연마해온 장인들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다르게 그려지면 그것을 결함으로 인식하였으니, 그 결함이 스타일이나 개성으로 불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함이라 불리우는 이 개성의 표현은 위대한 그림을 그리고 난 후 서명하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2) 살인자에 대하여

 소설을 읽는 내내 돌고 도는 이야기에 ‘그건 그렇고, 그래서 살인자가 누군데?’ 라며 읽기를 포기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끈기 있게 읽다보니 그 해답을 2권의 종지부를 달릴 때 쯤, 셰큐레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독자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아, 이 부분은 여러분들이 직접 읽으며 추리해갔으면 좋을 것 같아 생략하고 넘어간다.



3) ‘빨강’의 의미

 나는 책을 읽으면서 때때로 인물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앞의 입장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다시 돌려보기도 하며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다 읽었을 때는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빨강’이란 단어에는 과연 어떠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까?
 빨강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의미들은 사랑, 정열, 열정, 질투, 강렬함, 공포, 피, 죽음과 같은 것들이다. 대개 강렬하고 뜨거운 느낌이 강하다. 이 소설 속에는 저 의미들 중 최소 세 가지 이상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랑, 열정, 죽음을 꼽을 수 있겠는데, 빨강에 대한 갖가지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것은 이 책이 주는 또 다른 흥미로움이었다.

 남들에게 잊히지 않고, 명예롭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이 소설 속에서 부각되는 심리들이다. 군계일학, 선명하고 튀는 빨간색, 다가오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마음. ‘야망’의 빨강이다. 또 다른 것은 올리브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빨강이다. 예술가의 고뇌와 집념, 그로부터 기인한 공포감은 곧 살인으로 이어져 죽음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두렵고 불안한 ‘공포’의 빨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빨강은 ‘사랑’을 뜻하기도 했다. 이는 셰큐레와 카라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소설의 기반에 깔려있던 이면적인 것이 예술의 문제였다면 사실상 소설의 전반, 표면적으로는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주된 스토리였다. 아버지 몰래 연정을 품어온 세큐레의 수줍음과 카라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또 다른 빨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옅어졌다가도 다시 타오르는 정열의 색이었다.

 소설에서 치열하게 그려졌던 사랑과 예술, 욕망과 고뇌 그리고 죽음. 이것들은 모두 ‘빨강’의 의미로 귀결되며, 이를 통해 나에게 많은 궁금증을 유발했던 제목인 ‘내 이름의 빨강’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소설 속에서 자연스레 일러주었다.

   




 ‘나는 전 생애를 통해 두 점의 그림이 그려지길 은밀히, 너무도 갈구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첫 번째, 나의 초상화가 그려지길 바랐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죠. 왜냐하면 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볼 수 있다고 해도, 술탄의 세밀화가들 중 그 누구도 눈과 입을 중국인처럼 그리지 않으면 여자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중략) 후대 사람들은 내 눈이 사실은 동양인들처럼 위로 치켜 올라가 있지 않았음을 안다 해도 실제 내 얼굴이 어땠는지는 전혀 알 수 없을 거예요.
 두 번째, 행복의 그림이 그려졌으면 했습니다. 두 아이가 있는 어떤 어머니의 그림이죠. 그녀의 품에는 미소를 지으며 행복하게 젖을 빠는 아이가 있고, 약간 질투하는 큰아이와 엄마의 눈이 마주치고 있지요. 시간을 멈추게 한 헤라트파 옛 장인의 화풍으로 그려졌으면 했지요. 알아요, 쉽지 않다는 걸.’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세큐레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다. 오르한 파묵은 서양의 초상화만으로나 동양의 세밀화만으로는 온전히 행복해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대립이 아닌 화합과 조화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현실도 소설과 맞닿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을 취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본인의 몫이지만 그 자체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을 두고 시비를 가리는 모습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향유해온 고유의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운 문화와 양식을 무비판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독자에게 현실의 문제점을 소설을 통해 제시하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은 오르한 파묵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성지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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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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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달곰
    • 안녕하세요, 지윤씨. 보암보암 기고 중인 반채은입니다.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사실 시험기간이라 아트인사이트에 올라오는 글들을 많이 읽지 못했는데 놓치고 갔으면 후회했을 글과 책과 작가네요! 터키 작가의 소설이라니, 개인적으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저자 밀란 쿤데라에게서 지윤씨와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뭔가 이국적이고 독특한 느낌. 문화적인 배경때문에 우러나올 수밖에 없는 다름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지윤씨의 글만 읽었지만 아마 <내 이름은 빨강>도 그럴거란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도 책에서 포착하신 3가지 요소, 예술, 살인, 빨강이라는 주제들을 하나하나 분석해주신 점이 좋았습니다  저는 어떤 작품에 대한 글을 쓸 때 여과없이 전체 이야기를 드러내는 편이에요. 일부러 그렇게 한다기 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을 쓰는데 어려움이 있더라구요. 지윤씨의 글은 자세하면서도 스포가 없어서 그런지 책을 꼭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마지막에서 단순한 분석을 넘어 지윤씨의 의견을 넣어주신 점도 인상깊었어요. 글이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갖추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만 이을 보다 구체적으로 피력해주셨다면 지윤씨의 감상에 더욱 깊게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짧은 피드백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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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밀리
    • 지윤님 덕분에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어 기쁩니다 :) 개인적으로 좋은 독후감이나 서평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책을 읽어보고 싶게 하는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성공한 글인 것 같습니다. 추리소설과 로맨스 속에서, 예술가들의 갈등, 문명의 충돌과 같은 거대한 주제를 그린 오르한 파묵 작가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러한 주제들을 두 권의 복잡한 책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신 지윤님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스타일과 개성에 관한 문제가 인상 깊어요. 저도 글을 쓰지만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의 개성에 대한 욕구, 창작에 대한 열망 같은 것에 항상 이끌리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멀게 느껴졌던 나라 터키에서도 이런 갈등과 욕망이 있었다는 게 생소하면서도 재미있게 다가오네요. 좋은 책 소개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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