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에 의문을 던지다 [문화 전반]

도서 「거울에 비친 유럽」을 통해 본 유럽의 왜곡된 정체성 이야기.
글 입력 2017.06.15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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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적 동화 속 공주님 이야기에서부터,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파리의 노트르담까지 '유럽'은 내게 있어 하나의 준거집단 같은 것이었다. 이제껏 실행에 옮기진 못했지만, 꼭 전통과 문화유산이 살아 숨쉬는 것만 같은 유럽에서 한 달만이라도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은 여태까지의 삶에 있어 진학을 포함한 몇 가지 중대한 결정에서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세계사 공부나 여러 제 3세계 관련 서적을 읽으며 이러한 막연한 환상은 조금 깨졌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의 문화나 건축물 같은 것들은 내게 있어 사대주의라고 하기엔 조금 억울한 일종의 길티플레저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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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인 비하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세르비아 배구팀


  하지만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의 이야기는 내 환상과는 달랐다. 즐겁게 여행하다 오기는 했지만 동양인 여성에게 보내는 '캣콜링'을 비일비재하게 겪었고, 제법 큰 도시에서도 가게 점원이라던가 공관의 직원들이 차별적인 시선을 보낸 것을 꽤 자주 느낄 수 있었다고 친구들은 말했다. 백인 우월주의의 정신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이는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최근 유나이티드 항공에서 중국인이 무차별폭행을 당했지만, 서양인들의 비판은 폭력에만 초점이 맞춰져있었고 레이시즘에 대한 반성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읽게 된 「거울에 비친 유럽」은 이런 의미에서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얄팍하게나마 느꼈던 서구의 모순된 지점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서구 중심적 시각의 역사를 만들어왔는가를 조목조목 따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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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유럽은 미개하고 덜 발전한 ‘야만인’과의 대조를 통해 자신들을 구별하였다. 야만인들에게는 실제로 그들이 갖고있지도 않은 부정확하고 단일적인 속성을 부여하고, 자신들에게도 역시 실제의 것이 아닌 이상화된 모습을 부여하였다. 역사는 이러한 야만인으로 인해 로마 제국이 붕괴하였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로마화하지 못한 농민들’에 의해서도 제국의 붕괴가 이루어졌었다. 처음 듣는 유럽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니, 들어본 적이 있다 할지라도 농민들에 의해서 제국의 해체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것 같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러한 이야기가 고의적으로 숨겨졌고, 대중들이라는 또 다른 야만인들로 인한 문명의 파괴를 막기 위해서 지배계급에 의해 지속적으로 은폐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쯤되니 「거울에 비친 유럽」이라는 제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거울은 사실과 같아 보이지만 필연적인 왜곡을 발생시킨다. 왜곡된 모습은 자기 자신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해 줄 수 있고, 특히 이것이 ‘역사’의 왜곡된 모습이라면 이것은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저자는 ‘기독교의 거울’과 ‘악마의 거울’을 통해 유럽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는 기독교에 관한 왜곡을 다루고 있다. 최초 단계의 기독교는 여러 교파가 공존했지만, 곧이어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되면서 이단을 규정하고 교회는 세속화되었다. 다원적인 성격을 띠고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었던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또한 ‘승리한 정통 교리’만이 살아남아 나머지 교리들을 억압하고, 승리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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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교회를 다니고 세계사 수업에서 니케아 공의회에 대해 배울 때쯤, 머릿속엔 어떤 혼란이 자리 잡았다. 지금 믿고 있는 교리가 정말로 소중하게 다루어져서 신으로부터 전달된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들의 필요에 의해 편집된 것이라는 혼란이었다. 만약 그 때, 삼위일체설이 당시 이해관계에 맞지 않아 승리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삼위일체의 신이 아닌 완전히 다른 신을 믿고 있었을 것이고, 삼위일체의 신을 믿는 것은 어쩌면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교회에서 알려주는 교리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의 교리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해서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신앙심이 줄어든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경험에 ‘거울에 비친 유럽’에서의 세세한 분석이 더해져 기독교 역시 승리자에 의한 것이고, 이단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을 보여줌으로써 겉으로는 ‘신성한 척’을 했지만 사실은 매우 세속적인 목적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덧붙여 이러한 이단에 대한 규정도 야만인과 마찬가지로 그 기준이 모호했고, 농민들 사이에 존재했던 민중 계층의 신앙이 지배계급에게 역시나 위협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촌뜨기의 거울’과 ‘궁정의 거울’에서도 역시 지배계급의 억압이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피지배계급이 직접적으로 저항을 행동에 옮겼고, 이 사실이 뚜렷이 역사에 기록되었다. 솔직히 앞서 살펴보았던 거울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이 터무니없는 억압이 나타났지만, 이러한 저항이 확실하게 서술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 움직임들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하기 위해서 서술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저자는 우리가 이러한 저항들을 시대의 ‘정상적인 것’에 비추어 평가해야할 구체적인 사건들로만 바라볼 것을 요구당했다고 말한다. 관계를 찾으면 다른 생각의 발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비판적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저항들이 사실은 촌스러운 것이 아니고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자신들은 고상하고 품위있지만, 농민들은 무식하고 촌스럽다는 편견을 부여함으로써 비판적 문화를 납득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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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무식함과 촌스러움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현재로선 너무나 당연한 통념을 가리는 데 아주 크게 기여한 것 같다. 최근 여성학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최초의 인류가 탄생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대체 왜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우리가 배우는 이론들을 고안한 수많은 과거의 지성인들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근시안적인 사고를 갖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비단 농민들로 대표되는 피지배계급만을 억제하기 위해 ‘촌스러움’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비주류 계층에게도 부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신과 구별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다른 것들을 정의하고, 의도가 불순한 이러한 정의들은 끝내 여러 가지 나쁜 결과들을 초래했다. 자신들의 역사가 진보하였음을 강조하며 원주민들을 ‘유럽화’하는 데 몰두하고, 이러한 과정을 정당화했다. 항해 기술이 발달하면서 여행자들의 기록을 살펴보고, 다른 문화의 존재를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은 외면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자신이 왜곡된 거울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계몽주의에 대해 처음 배울 때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최초의 인종차별주의 이론가들이 계몽적 전통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왜곡된 반사는 산업혁명 이후에 여러 노동 문제를 발생시켜 인간의 존엄성까지 해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 집단의 끊임없는 자기 세뇌와 이성이 결여된 판단 때문에 결국 인간을 도구화하고, 인종 청소를 저지르며, 제국주의가 등장하고,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화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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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 집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까지는 괜찮을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왜곡과 오류를 범했고, 이분법적 사고를 지속적으로 행해왔다. 하지만 나 역시 이런 위험한 생각에서 자유로웠던 걸까? 성당들, 예술품들을 보며 설렜던 마음조차도 사실은 나에게 ‘강요된’ 유럽의 역사 때문은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회의가 계속해서 마음에 일었다. 그들의 문화와 많은 유산들을 완전히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럽이 저자의 주장처럼 과거의 오류를 수용하고, 역사를 진보의 과정으로 보는 단선적 견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유럽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수용했던 비유럽인’인 나 또한 편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나아가 다채롭고 각자의 문화에 대한 존중이 있는 세계가 도래하길 바란다.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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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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