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극 『맨 끝줄 소년』 : 방점을 찍다 [공연예술]

글 입력 2017.06.1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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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맨 끝줄 소년, 클라우디오


 헤르만은 맨 끝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장 좋은 자리야. 아무도 거기는 못 보는데 거기서는 모두를 보지.”
 맨 끝줄 소년은 그렇게 존재한다.
 
 연극은 헤르만이 반 아이들의 작문을 검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0점, 1점, 0점, 2점. 형편없는 점수들이 나열되고 헤르만은 아이들의 작문을 보며 절망한다. 그러다 헤르만은 발견한다. 헤르만에게는 없는 재능이 있는 소년. 맨 끝줄 소년을 말이다.
 <맨 끝줄 소년>의 클라우디오는 살아있는 묘사를 위해 라파의 가정 속으로 계속해서 스며들어 간다. 수학을 못하는 라파에게 수학을 가르쳐주고, 본인은 라파에게 철학을 배운다는 명목 뒤로 클라우디오의 관음적 시선은 라파의 가정을 훑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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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라파지? 내가 왜 라파를 택했지?
왜냐하면 라파는 나와 정반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난 나에게 물었다.
저 집은 어떨까? 평범한 가족의 집은 어떨까?”


 
 클라우디오는 라파를 펜촉 위에 세운 이유에 대해 ‘정반대의 지점’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클라우디오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클라우디오의 집은 라파와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평범과 특별로 나누자면 특별에 해당하는 이 지점을 클라우디오는 숨기고 싶어한다. 그 증거로 클라우디오는 극이 진행되는 내내 모두를 보고, 모두를 묘사하지만 자신이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 마치 극 속에서 빠져나와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 혹은 연출가처럼 관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극을 이끄는 존재는 분명히도 클라우디오다. 클라우디오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마치 김영하의 소설처럼 말이다.



(클라우디오가 종이 몇 장을 꺼내 헤르만 앞에 놓는다.)

 “재미없으면 돌려주세요.”

 

 클라우디오는 글쓰기와 욕망을 섞어 새롭게 창조한다. 클라우디오의 시선은 라파의 어머니를 위험하게 욕망한다. 이 욕망은 육체적 욕망 보다는 정신적 욕망에 가깝다. 어쩌면 이 욕망 조차도 허구일 수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은 결국 클라우디오의 눈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이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오의 글이 모두 사실은 아니지만 모두 거짓도 아니다. 환상은 여기서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은 클라우디오가 남기고 간 종이를 바라본다. 헤르만의 시선이 종이로 향한다. 동시에 극은 종이 속으로 전환된다. 환상은 단순히 내용만의 환상으로 남겨지지 않는다. 극의 전환이나 대사의 흐름 역시 일정 부분 환상성에 기인한다. “재미없으면 돌려달라”는 클라우디오의 말에 집중하기도 이전에 관객의 시선은 환상처럼 피어난 클라우디오와 라파의 대화로 흘러간다.

 집요하게 라파의 가정을 맴도는 클라우디오의 욕망은 비틀린 오이디푸스적 욕망으로 보이기도 한다. 클라우디오는 아버지와 함께 살지만 둘은 극의 후반에 이르기 전까지 마주치지 않는다. 극에 후반에 이르러서도 사실상 둘은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는다. 관객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아침을 차려드리고(……)”라는 클라우디오의 짧은 증언으로만 클라우디오의 아버지와 만날 뿐이다. 클라우디오는 라파의 가정을 훔쳐보면서 라파의 어머니를 연민하는 동시에 욕망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라파의 아버지를 향해선 부정적이며 공격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중요한 것은 클라우디오 뿐만이 아니라 극 중 인물 모두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라파는 수학 점수를 잘 받고자 하는 욕망을, 라파의 아버지는 중국인과 계약을 체결한 뒤 자신만의 사업을 하는 욕망을, 라파의 어머니인 에스테르는 그녀를 삼키고 있는 집을 나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후아나 역시 욕망을 가지고 있다. 후아나는 예술을 모르는 쌍둥이 자매로부터 벗어나 갤러리를 운영하고자 한다. 헤르만의 욕망은 관객의 욕망과 일치한다. 헤르만은 자신에게는 없는 재능을 가진 클라우디오를 욕망하고, 클라우디오의 글을 욕망한다. 이는 사실상 관객의 욕망을 대변하는 셈이다. 관객은 클라우디오의 글을 기다리며 클라우디오를 관음한다. 관객은 클라우디오에게 관음증적 욕망이라 말하지만 실상 진정으로 관음하고 있는 존재는 관객이다. 예컨대 극의 후반에 이르면 클라우디오와 헤르만은 객석 계단에 앉아 건물 창 속을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과 함께한다. 그들은 싸우는 두 여자를 향해 자신들만의 상상력으로 여자들을 짐작한다. 재미있는 점은 관객들 역시 클라우디오와 에스테르의 모습을 보며 각자의 상상력으로 둘의 결말을 짐작한다는 것에 있다. 결국 헤르만의 욕망은 침묵하고 있는 관객의 욕망이다. 현실과 환상이 모호한 공간 속에서 관객은 사라지고 욕망하는 시선들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2.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


 결핍은 채워질 수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갖는다. 동시에 채워지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에 절망으로 바뀌기도 한다. 클라우디오의 성장은 결핍의 욕망을 먹으며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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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구두법은 아주 좋아.”

클라우디오 “저는 과학 계열을 더 잘해요. 하지만 올해는 언어를 잘해 보려고요.”

헤르만 “내용을 이야기하는 거야. 너는 우리 반에 있는 다른 애랑 그 가족에 대해서 말하더구나. 누군가에게는 그게 안 좋게 보일 수 있어.”

 

 맨 끝줄에 앉는 소년은 모두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지 않는 흔적 같은 존재다. 분명히 남겨진 모습은 있지만 그 모습은 선명하지 않다. 소년의 결핍은 이런 것이다. 선명함, 상상력, 지지자 같은 것들. 모두를 볼 수 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자리는 섬과 같다. 그곳에 있음은 알지만 주의 깊게 살필 필요는 없다. 소년은 그렇게 흔적 같은 존재로 남는다. 그렇기에 소년의 결핍은 선명함이다. 누구에게도 선명하게 기억되지 않는 존재를 벗어나 누구든 기억하는 선명한 존재. 특히나 헤르만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소년의 결핍을 확인할 수 있다. 헤르만은 소년의 ‘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소년은 글이 아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던 맨 끝줄의 소년에게 타인의 관심은 결핍을 채워주는 소중한 샘물이다. 이제 소년의 결핍은 욕망을 통해 채워진다. 소년은 자신의 글로 선명함과, 지지자를 얻었다. 헤르만이 그 대표적인 증거이다. 소년의 글이 계속해서 과감하고 파괴적이 되어 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디까지 채워야 하는 지 모르는 존재는 그것을 넘칠 때까지 따른다. 충분히 채워졌음에도 그것을 ‘채워졌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극이 진행되면서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에게 몇 권의 책을 추천해주는데 그럴 때마다 클라우디오의 글은 헤르만의 의도대로 완성되어 간다. 헤르만이 지적하면 클라우디오는 받아들이고 헤르만이 추천하면 클라우디오는 책을 읽는다. 그러나 클라우디오의 채움이 완성되어 가고, 소년이 스스로의 자리를 벗어나 다른 자리로 갈 수 있게 되자 상황은 달라진다. 클라우디오는 더 이상 헤르만의 요구를 듣지 않는다. 클라우디오의 글은 헤르만의 글을 벗어나 클라우디오의 글로 남겨지게 된다.

 여기서 에스테르는 소년을 맨 끝줄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장 큰 욕망이 된다. 소년의 시선은 집 바깥에서 안으로, 결국에는 부부 침실까지 도달한다. 소년이 집 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서 소년은 자신의 자리인 맨 끝줄을 벗어날 준비를 한다.
 
 욕망의 지지자였던 헤르만을 떨쳐낸 클라우디오는 스스로 라파의 집에 향한다. 헤르만을 위한 글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글을 위해서다. 이제 클라우디오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글을 쓰지 않는다. ‘글’이 없어도 혼자 버텨낼 수 있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결국 클라우디오의 성장은 얻은 것들을 내려놓으면서 시작된다.

 연극 <맨 끝줄 소년>은 다양한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문학과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가 보는 ‘관점’이란 무엇인가?” 이 수많은 질문들을 받게 된 관객은 암전된 잠깐의 장면 동안 그에 대한 답변에 대해 고민한다. 객석이 더 이상 객석이 아니라 무대라 한 이유는 이것이다. 관객은 배우에게 몰입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배우가 되어 객석이라는 무대에 있다. 이야기가 던지고, 배우가 표현하고, 관객은 답을 찾는다. 이는 완벽한 삼위일체의 모습이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후반부에 이르러 클라우디오가 객석 사이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주인공의 동선이 아닌 무대(정면)를 바라보고 있던 관개들의 소름끼치는 일관성은 나를 미치게했다. 그곳에 관객은 없었다. 공원의 흑인들이, 널브러진 노숙자들이, 낮에는 없는 모든 것들이 그곳에 소품처럼 놓여있을 뿐이었다. 결국 모든 장의 순간마다 우리를 유혹하는 방점이 찍혀있는 것이다.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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