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통합'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불러온 참극, 오페라 자명고

글 입력 2017.05.30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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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불러온 참극
오페라 자명고


[최종] 포스터-오페라 자명고.jpg
 

나이 들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모두가 영원히 뜻을 함께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뜻이 맞거나, 대의를 위해서 함께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잠시일 뿐이다. 대의를 이루면 그 안에 세부적인 부분에서 또 다시 뜻이 갈린다. 결국 ‘통합’이란 말은 허울 좋은 구실일 뿐, 결코 영원할 수 없다. 만약 완전한 통합을 이뤄냈다면 그것은 어떤 이들의 의견을 묵살한 것이리라. 혹은 뜻이 맞지 않는 이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원체 ‘통합’이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통합이란 환상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깔아뭉개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옳은’ 것으로 통합을 했다고 할지라도, ‘저딴 의견’ 정도는 통합돼도 되는 거 아니냐고 할지라도. 혹여 그 ‘저딴’ 이들이 집권을 잡을 때면 같은 논리로 ‘옳은’ 것들을 억누를 것을 알기에, ‘통합’이란 말이 얼마나 많은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는지 알기에. 나는 기본적으로 ‘통합’이란 환상을 믿지 않고 싫어했다.

사실 그래서 처음 <자명고> 프리뷰를 쓸 때 약간 고개를 갸웃했었다. 자명고를 통해서 ‘민족 통합’이란 메시지를 주겠다고 했을 때, 내가 과연 그 메시지에 동감할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 전 ‘역사’, 그리고 ‘우리의’ 민족에 대한 통념을 깨는 이야기를 들었었기에 반감은 더욱 심했다. 현재 우리가 ‘우리’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들은 대부분 영토를 기준으로 나뉜 역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야, 낙랑,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을 ‘우리’ 역사라고 인식하는 것일 뿐, 사실 그들을 ‘우리’라는 범위로 엮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란 설명이다.

어린 시절 삼국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보며 ‘저 힘으로 다른 나라랑 싸우지, 왜 ’우리‘끼리 저랬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시각 자체가 ’지금‘의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일 뿐이란 것이다. 당시엔 각국은 단지 인접국이었고, 가끔 아군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적국이었던 나라였을 뿐이었다. 결코 ’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명고에서 ‘고구려’와 ‘낙랑’이 본디 한 민족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느껴졌다. 한 민족이라 말하는 것은 결국 ‘지금’의 우리가 말하는 시점일 뿐. 당시 낙랑 입장에서 고구려나 오랑캐나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자명고의 시놉시스를 읽는 동안 수많은 생각이 들었고, 고민도 됐지만 결국 보러 가는 것을 택한 건 자명고가 ‘예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술은 이성적으로 하나하나 따지기 전에 그 입장이 이미 마음 속에 내재하게 만드는 장르다. 철저하게 경험의 장르고, 보기 전엔 의문이 드는 서사도 막상 그 안에서 설득력 있게 만들어 놓으면 괜찮은 작품이 된다. 그러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떨지는 직접 보고 판단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자명고 2.JPG
 

하지만…시놉시스를 볼 때 들었던 의문은 공연을 보면 볼수록 더해져만 갔다. 내가 원체 ‘민족통합’이란 메시지에 동감하고 있지 못하던 것도 있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자명고는 너무 설득력이 없었다. 일단 공주궁에 처 들어 오자마자 자신에게 ‘자명고’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하는 호동의 캐릭터 자체가 설득력이 없었다. 적국의 공주에게 뜬금없이 그 보물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하면, 그걸 알려줄 이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전에 ‘한 민족’이었다고 할지라도 현재 고구려는 낙랑의 적국이다. ‘과거’ 혹은 ‘본디’어땠는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일단 지금은 적국이고, 서로 수많은 이들이 서로의 칼에 죽어갔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호동의 태도는 너무 당당했다. 마치 ‘본디 한 민족’이란 서사에, 다들 당연히 동감할 것이라는 듯 말이다. 두 나라 사이의 수많은 감정들과 이해관계들을 ‘한 민족이었다’는 말로 퉁치려는 호동은 당황스럽다 못해 괴이할 정도였다. 설득력이 있는 주장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토록이나 당당하게 구니 ‘호동’이란 캐릭터 자체의 설득력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호동이 ‘평화통일’이나, 낙랑을 중심으로 한 합병을 제시했다면. 아니 하다못해 낙랑의 자주적인 권리를 어느 정도 인정 해 줄 테니 고구려 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면. 그랬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와 낙랑은 서로 전쟁을 하는 국가였다. 실제로도 호동은 자명고가 찢긴 낙랑에 ‘처들어’온다. 전쟁으로 그 통합을 이루려 하고, 그를 위해 ‘전쟁도구’인 자명고를 찢고자 하는 이가 어떻게 감히 ‘한 민족’ 운운하며 오랑캐를 나무랄 수 있는지. 같은 논리로, 북한이 만약 ‘우리는 한 민족이니 남한이 북한에 정복당하면서 통일하자’고 말하면 그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 되묻고 싶었다.

그 주장에 넘어가는 낙랑공주는 호동보다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제 3자가 봐도 터무니없는 그 주장을 보고 호동에게 감복하고, 그에게 반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심지어 적국의 왕자인데, 그 잠깐으로, 그 말도 안 되는 주장 때문에 나라를 배반하며 그를 몰래 탈옥시킬 정도로 반했다는 건 억지에 가까웠다. 사랑 때문이 아니라, 신념에 설득당한 낙랑을 보여주겠다고 했었지만. 차라리 사랑에 미쳐 무지몽매해진 것이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동에게 속는 낙랑이 답답하긴 했겠지만, 그래도 설득력은 있었을 테니 말이다.

두 주인공이 이해가지 않기 시작하자 그 이후 모든 서사에 몰입이 잘 안됐다. 나라를 배반하고, 자신을 평생 지켜온 호위무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호동이랑 키스하고 스킨십을 하는 낙랑의 모습은 이해해 보려는 시도조차 못하게 만들었다. ‘온 고구려 국민이 온 마음을 다해’ 한 민족이 함께하길 바란다고 확언하는 호동에겐 코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아무리 자국민이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저런 것을 확언하는지 궁금했다. 낙랑과 고구려의 통합에 앞서, 자국민마저도 ‘통합된 무언가’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차라리 적국의 장수로, 나름대로 낙랑과 맺은 약속을 잘 이행하고 있는 진대철에게 더더욱 감정이입이 됐다. 약속을 잘 지키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진대철은 낙랑에게 ‘꽃’이라고 하는 등 마초적인 모습을 보일지라도 차라리 설득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약속을 지켰을 뿐인데 나쁜 놈 취급당하고 마지막엔 호동에게 쫓기는 그의 신세가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자명고 대표사진.jpg

 
원체 뮤지컬을 좋아하고, 클래식도 어느 정도 좋아한다. 그래서 음악 부분에서도 취향이 있는데, 다같이 합창하는데 그 와중에 한 사람 목소리가 그 사이를 뚫고 나오는 것이 그것이다. 서사가 어지간하게 별로여도, 그런식의 연출만으로도 눈물을 쏟은 적이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자결한 낙랑을 호동이 마주한 순간. 낙랑을 칭송하는 이들의 목소리 사이로, 호동의 목소리가 나름 ‘감동적이게 하려고’ 뚫고 나오는데 이번 만큼은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그 좋은 음악, 그 좋은 노래실력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 자체가 코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공연 자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맨 처음 시작하는 부분의 북춤이라던가, 중간부분의 검무는 무척이나 좋았다. 특히 검무부분은 그 절도에 눈을 떼지를 못했다. 물론 북춤이나 검무때도 위에 자막판에 나오는 '통합', '한 민족', '형제' 이런 말들만이 계속 나와 강요당하는 기분까지 들긴 했었지만. 그래도 춤 자체는 좋았었다.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은 말할 것도 없고, 배우들의 노래실력이나 연기력도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그 자리에 앉아있던 것이 아깝지 않았다. 사실 오페라는 ‘서사’가 중심이 아니라, 음악이 중심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워낙에 ‘이야기’에 담기는 이데올로기에 예민한 나로서는, 그 좋은 음악과 춤에도 불구하고 자명고를 좋게 느낄 수 없었다. 서사가 감정을 메마르게 해 음악의 아름다움도 반감됐다. 차라리 서사가 없이 음악만 들었다면 더 나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야기는 분명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사람들에게 전할때 효과적인 도구다. 하지만 '효과적'일 뿐 '쉬운' 도구는 아니다. 이야기가 무언가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선 서사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통해 설득력을 갖춰야만 한다. 고민이 없는 서사는 오히려 반감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사람들에게 어떠한 메세지를 전하고, 깨달음을 주고자 했다면. 서사에 대한 고민이 훨씬 더 많이 필요했다.

자명고를 보면서 통합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내게 '통합'이란 말은 결코 좋게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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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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