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완성되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문학]

글 입력 2017.05.26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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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기능을 하는지조차 잘 모르는 신체의 일부를 먹고 싶다는 제목은 다소 경악, 혹은 괴기스러움에 가까웠다. ‘먹고 싶다’는 말은 ‘먹어 치워버리고 싶다’는 어감으로 다가왔고, 그러면서도 어울리지 않게 분홍색 벚꽃잎이 흐드러지는 표지를 보면서 강한 호기심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었다. <무서운 영화>가 정말 무서운 영화가 아니었던 것처럼, 잔인한 살인사건을 다뤄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의 이 소설도 표지처럼 첫인상과는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일까.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스미노 요루’가 다양한 문학상에서 좋지 못한 결과를 얻은 자신의 소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웹사이트 ‘소설가가 되자’에 올렸던 이야기다. 웹사이트 내에서도 비록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운이 좋게도 한 작가의 눈에 띄어 소설로 출판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영화로까지 제작되고 있다. 쟁쟁한 작가들 사이에서, 정식절차도 밟지 않은 신인 작가가 보여준 놀라운 성과는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이처럼 스미노 요루가 많은 사람들을 눈물 나게 만드는 작가가 된 데에는 그리 오랜 기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소설 속에서 ‘친구’라는 관계에 어떠한 호기심이나 미련도 없던 주인공이 사쿠라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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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생활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를 가장 슬프게 만들었던 것은 병에 지쳐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의 모습이었다.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내일을 위해, 다신 못 볼지도 모르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르는 힘을 내려 한다는 것. 병으로 친척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나로서는 지극히 현실적이었고, 그래서 더 아팠던 부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비춰보았을 때 작품 속 췌장암에 걸린 ‘사쿠라’의 모습은 내게 있어 비현실에 가까웠다. 모두가 당연시 여겼던 일상을 지키기 위해 1년이라는 시한부를 선고받고도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일절 그 사실을 비밀로 한다는 것부터, 죽음을 앞두고도 살아있다는 것에 온전히 집중하려는 모습까지. 땀을 흘리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삶에 대해 되묻고, 남들과 별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매일 적어나가는 그녀의 면모는 대부분의 시한부 환자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무엇이 존재했다.
 
이야기는 주인공 ‘나’가 같은 반 친구인 ‘사쿠라’의 투병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생기는 일들을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 흥미로웠던 점은 주인공 ‘나’가 한 번도 친구를 사겨본 적 없다는 것인데,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적이 없기 때문에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을 불필요한 감정소모라고 여기기까지 한다. 누가 말을 걸어도, 다른 친구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녀도, 하물며 예쁜 친구가 옆에 지나가더라도 자신과는 그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캐릭터부터 소설이다, 싶을 만큼 놀랍도록 반(反)사회적인 인물이었다.
반면에 ‘사쿠라’는 밝은 성격 탓에 학교 내에서 친구도, 인기도 많은 인물이다. 어떤 친구와 어울리는지조차 학교 내에 소문이 나고, 남자 동급생들을 질투하게 만들고, 한 사람의 꽉 닫힌 마음의 문도 열게 할 만큼.

사쿠라는 1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온전히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일들로 채우기 위해, 그리고 머지않은 자신의 죽음을 일상처럼 여길 수 있도록 매일을 공책에 기록한다. 사쿠라는 다른 친구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고 있는 정반대 성격의 ‘나’에게 관심을 느끼고, 특유의 붙임성으로 ‘나’와 친해지려 노력한다. 자신의 병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사실도 숨길 필요가 없고, 그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일상을 지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나’는 어쩌면 사쿠라에게 쉼터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녀의 기록이 ‘투병일기’가 아니라 ‘공병(共病)문고’였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겠지.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 살고 있는 모든 순간을 선택이라고 이야기하며, 펴있는 벚꽃에게 ‘자신이 바라보는 벚꽃은 또래 어느 누구의 벚꽃보다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하는 사쿠라의 대범함은 동시에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참고로 주인공을 ‘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말에 다다라서야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부르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누군가에겐 수많은 상상을 하게 만들고, 누군가에겐 소원이기도 했던 것. 소설 속에서 ‘이름’이라는 명사는, 그런 뜻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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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결말에 가서야 막이 내리고, 드라마는 마지막 회까지 이어져야만 비로소 끝이 난다. 나 또한 책을 읽으면서 영화와도 같았던 그녀였기에 사쿠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이었고, “죽을 때가 되면 미리 말해줄게.”라던 그녀의 말을 의도치 않게 거짓말로 만들어버렸다.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을 기다리며 혼자 앉아있는 한 소년의 모습이, 그리고 예쁜 옷을 입고 길바닥에 쓰러져있는 사쿠라의 모습이 자꾸 마음속에 겹쳐져서 더 크게 다가왔다. 끝까지 이어져야 했던 소설은, 말 그대로 몇 페이지의 긴 공백이 생겨버린 것이다.    
 
보통 우리는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책에서 두 주인공은 상대방의 생각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알게 되면서 우정을 넘어 서로를 동경하게 되는데, 그 때 비로소 알게 된다. 처음에는 기이하게만 들렸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말이 얼마나 묵직한 메시지이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는지를. 아마 그들이 말하는 ‘먹는다’는 표현은 ‘사랑한다’는 어떤 말보다도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택이 서로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는 존재가 되었던 것처럼, 만약 작가와 소통할 기회가 생긴다면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당신이 바랐던 대로 책을 읽기 전과 후에 제목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고, 그리고 제목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내용으로 삶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고 곱씹어볼 수 있었다고.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과, 불확실한 내일을 위해 오늘에 보다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준 소설이었다.

 
“비밀을 알고 있는 클래스메이트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없지는 않다, 고 할까.”
“근데 지금 그걸 안 하고 있잖아. 너나 나나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는 너나 나나 다를 거 없어, 틀림없이. 하루의 가치는 전부 똑같은 거라서 무엇을 했느냐의 차이 같은 걸로 나의 오늘은 바뀌지 않아. 나는 오늘, 즐거웠어.”
 
-
 
나는 졸업할 때까지 틀림없이 이 길을 계속 걷게 될까. 그녀는 앞으로 몇 번이나 똑같은 길을 걸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 그녀가 말한 대로 나 역시 앞으로 몇 번이나 이 길을 걸을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한다. 그녀가 바라보는 길거리의 색깔과 내가 보는 길거리의 색깔은 원래대로라면 서로 달라서는 안되는 것이다.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내가 살아있는지를 확인했다. 심장의 박동에 맞춰 발을 내딛다 보니 덧없는 목숨을 억지로 흔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속이 울렁거렸다.
저녁 바람이 불어 아직 살아있는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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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예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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