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극히 일반적이나, 지극히 비극적인,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공연예술]

평범한 사람의 있을 법한 이야기가 더 비극적일 수 있다
글 입력 2017.05.25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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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을 접했던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고등학교에서 보여줬던 시립극단의 정기공연 한 편을 본 게 전부였기 때문에, 예술의 전당에서, 그것도 유명한 희곡을 본다는 것은 분명 새로운 느낌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작 텍스트를 미리 읽어두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눈앞에서 펼쳐질지 기대되는 마음이 가장 컸다. 전반적인 극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윌리가 보는 환영들, 플룻 소리, 윌리와 비프의 갈등 장면 등을 어떻게 표현하고 연출했을지 보고 싶었다. 영화에서도 이것들은 표현되었지만, 직접 눈앞에 존재하여 관객들에게 실재성을 느끼게 하고 더 몰입시키는 것은 분명 연극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작 텍스트도 꽤 길어 끊어 읽어서 그런지, 연극의 러닝 타임이 길고 인터미션이 있을지라도 흡입력만큼은 텍스트보다 더 뛰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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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일즈맨의 죽음>의 원작 제목은 'Death of a Salesman'이다. 주인공이 ‘윌리 로먼’이라고 알려주었음에도 제목은 그를 그저 ‘a Salesman’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윌리가 특정 인물의 특별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위에 있을 법하고 일반적으로 겪을 수 있는 일들을 표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텍스트로 읽을 때 윌리를 어렴풋이 50, 60대 남성으로 떠올리긴 했지만 막상 연극에서 우리나라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이야기가 더욱 와닿았다. 윌리의 모습에서, 그리고 아내 '린다'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한국의 아빠, 한국의 엄마의 모습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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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는 좋게 보면 신념이 강하고 큰 꿈을 꾸는 사람이지만, 보통 고집이 세고 현실감각이 없는 아버지로 보인다. 윌리가 아들 '비프'를 대하는 태도에서 현대 기성세대 부모님들이 자식들의 현실적 여건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그들 세대의 현실을 투영하여 바라보는 탓에 갈등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더구나 윌리는 현실감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환영을 보며 정신분열적인 증세가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벤' 형님이 나타나 윌리에게 계속해서 그릇된 꿈을 불어넣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극중 벤이 원작과 달리 우산이 아닌 등산스틱 같은 막대기를 들고 있어서 정글로 걸어들어가 일확천금에 성공한 모습을 강조하여 윌리를 더욱 현혹시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과정이 나타나 있지 않은 벤의 성공스토리는 제 3자가 볼 때 터무니없어 보이고, 허풍같이 느껴지지만 제대로 된 아버지의 교육을 받지 못한 윌리에겐 그 스토리가 인생의 진리처럼 다가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을 알고도 눈 앞에 나타나는 윌리의 막힌 태도와 비프와의 설전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하기만 했다. 사회생활에서도, 가정생활에서도 ‘조금만 양보하면 훨씬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극의 후반부에 바에서 지칠대로 지쳐버린 윌리의 모습은 윌리의 죽음보다 더 큰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헝클어진 머리와 풀어헤쳐진 옷이 회사에서 모욕적으로 잘리고, 아들과의 마찰은 끊이지 않고,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이 다시 떠올라 괴로운 윌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았다. 결국 윌리는 자신을 완전히 양보해버렸다. 가족들이 가장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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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 외의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텍스트에서 느껴졌던 인물의 감정과 같은, 혹은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느낌을 전해주었다. 특히 비프 역의 연기가 인상깊었는데, 외모는 훤칠한데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유약한 내면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텍스트에서 읽은 비프는 유약하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연민이 공존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다는 점에서 조금 더 강인하게 느껴졌는데, 극중 비프는 어두운 내면과 우울감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러한 느낌 덕분에 반복되는 윌리와의 설전이 더욱 관객들로 하여금 진이 빠지게 했을 것 같다.

  해피 역 역시 기본적으로 밝은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 에너지도 어딘가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극중 진중함이 결여된 채 있다가 결국 후반부에 아버지임을 부정하는 장면에서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비프와 윌리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오히려 해피의 애정결핍을 잘 드러내 준 것이 아닐까싶다.

  린다 역 배우의 연기도 전형적인 어머니, 한국적 어머니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린다에게서 윌리를 불쌍히 여기고,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길 바라면서 가족들에게 헌신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들들이 커서 그런지 린다 역의 배우가 상당히 왜소해보였고, 그 작은 몸집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강인하게 느껴져 놀랍기도 했다.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였지만, 린다마저도 윌리를 이해하는 데 결국 실패했음을 린다의 마지막 대사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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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에서 연출이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극중 무대장치와 오브제의 사용으로 알 수 있었다. 먼저 1막의 마지막 부분에서 양쪽 벽이 서서히 무대 중앙쪽으로 들어와, 마치 빌딩들이 윌리의 집을 옥죄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윌리가 30년 동안 차곡차곡 사들인 집과 그 안에 살고 있는 가족은 윌리의 전부이다. 그것을 서서히 조여들어오는 벽은 사회이자, 윌리 자신의 내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나무에 걸려있는 살덩어리가 극을 볼 때 얼굴 형상이 새겨져있는 장승처럼 보였다. 잡귀를 쫓는 수호신 역할을 하는 장승으로 그 오브제를 보았을 때, 벤을 윌리가 보는 일종의 잡귀, 유령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2막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그것이 떨어지면서 윌리가 벤에게 꾀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장승은 기괴하게 생겼다고 생각해서 항상 무서워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이 오브제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본래 연출가의 의도인 살덩어리로 보면 기괴한 느낌이 더 커졌다. 심지어 신체의 일부를 이용해 인간이 외면하고 싶어하는 혐오스러운 것을 표현하는 애브젝트 미술을 떠올리게 했다. 나무에 걸려있는 기괴한 형체는 우리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윌리의 위태로운 목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극적 장치들이 실제로 보여짐으로써 텍스트와는 또다른 긴장감을 자아내고, 새로운 해석으로 연극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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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의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을 비극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죽음엔 많은 의미가 담겨있고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비극적이기 때문에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꼭 선한 영웅이 사소한 결함 하나로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만이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개인에게도 비극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의 있을 법한 이야기가 더 비극적이고 연민과 공포를 더 잘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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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부모님 세대는 부모와 자식을 동시에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라고 한다. 자식들에게도 자신들이 부모님께 한 것처럼 부양해주기를 바라지만 현실 여건이 받쳐주지 않는다. 윌리의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벤의 세대에서는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윌리의 세대에서는 아니다. 비프의 세대에서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벤의 성공담을 듣고 자란 윌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과 비프에게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위 세대와 아래 세대에 대한 기대를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중간 세대의 모습은 현재 우리 나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또 윌리가 녹음기 앞에서 무능하게, 아이처럼 하워드를 다시 부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다음 세대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세대 차이로만 이 작품을 설명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위태로운 직장에서 예고 없이 해고되는 것, 내면에 분명히 실현 가능한 꿈이 존재했음에도 그것을 가로막고 물질적이고 허황된 꿈만 좇은 것, 영업으로는 결코 벌 수 없는 돈을 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현실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을 팔게 된 것 등 사회적 요인이 크게 개입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작품이 윌리 단 한 사람만의 문제로 생각하여 공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불륜을 저지르거나 아들들에게 도둑질을 은연중에 장려한 것 등을 생각해보면 윌리가 전혀 이해되지 않기도 한다. 또한 가족들이 윌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윌리가 죽음을 택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극 전반에 걸쳐 나타난 윌리의 모습에서 현실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도 허황된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싫어할 리는 없다. 또 힘든 상황에 부딪치면 좌절감과 열등감을 느끼고 자존감이 낮아지기 마련이다. 윌리의 살덩어리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비프처럼, 깨달음을 얻고 그를 통한 성숙을 하게 하는 것이 이 연극이 원하는 바가 아닐까.





이미지 출처 : 예술의 전당,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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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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