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래되고 구겨진 것의 미학, 구제 의류 [문화 전반]

글 입력 2017.05.2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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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낡은 대로. 포장을 뜯지 않은 새것만 어여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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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디자인을 전공하겠다는 선언으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열아홉 살 고등학생 시절, 입시미술도 수능공부도 아닌, ‘옷’은 당시 수험생이었던 나의 최대 관심사였다. 뭣도 모르던 때라 그저 선호하는 스트릿 브랜드의 옷을 무작정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행위인지를 깨달아 갈 때 즈음, 구제 시장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색이 예뻐, 흔하지 않아, 있어 보여 좋았다. 당시 유행하던 응답하라 시리즈 주인공의 것처럼 펑퍼짐한 원색의 점퍼가 참 멋있었다. 우리 동네 패션피플들이 자주 찾는다는 빈티지 샵에 무작정 들러 좀 특이해 보이는 옷들을 구매하고 주인 오빠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은 어떤 옷을 고르며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야금야금 주워 담았다. 그렇게 조금씩 구제의 참 맛을 알아가게 되었다.



1. 보물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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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세련된 빈티지샵이 대거 등장해, 멋쟁이들이 흔쾌히 구매할 정도로 훌륭한 디자인과 퀄리티를 지닌 옷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서울의 동묘나 부산의 남포동에 위치한 고전적인 구제시장에는 소위 ‘보물찾기’를 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천 원의 행복이 펼쳐진다. 산처럼 와르르 쌓아 놓은 옷 더미 사이를 잘 파헤치다 보면, 지폐 한 장에 나와 꼭 맞는 스타일의 예쁜 옷을 찾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 번 빨면 목이 쭉 늘어나는 싸구려 티셔츠도 한 장에 오천 원 하는 요즘 물가에 구제 보물찾기는 최고의 알뜰 쇼핑이 된다.
 
꼭 대박을 노리고 옷 더미를 파헤치지 않아도 구제는 저렴하다. 단순하게 이유를 찾자면, 새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하트, 슈프림, 챔피언 등의 인기 브랜드의 경우 국내에서 찾기 힘든 디자인의 의상이 몇 배 저렴한 가격에 판매된다. ‘구제의 왕자’ 칼하트의 자켓 시리즈가 입고될 때면 제품이 등장하기 무섭게 매니아들의 빈티지샵 출동이 시작된다. 드물게 블랙마켓에서 유통되는 새 상품이 빈티지 샵에 진열되는 운 좋은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2.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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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멋스럽다. 구제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펑퍼짐한 착용샷은 보는 이에게 왠지 모를 편안함을 안겨준다. 인터넷 쇼핑몰 판매 순위를 점령하는, 몸매를 한껏 부각하는 타이트한 의상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헐렁한 핏은 그 자체로 세련되고 고급지다. 나 이전의 누군가가 열심히 다림질 했을, 조금 바래 멀건 색감도 아름답다. 가장 중요한 점은 유니크함이다. 몇 십 년 전부터 최근까지 그 세월의 스펙트럼이 넓은 덕에 유행을 따르지 않는 옷은 자체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오늘 입어도, 10년 후에 입어도 촌스럽지 않다.
 

  
3.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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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소중하다. 우리가 싼 값에 득템한 이 옷은, 누군가 조심히 아껴 가며 입었을, 많은 추억과 사연이 담긴 물건이다. (이 때문에 구제에 대한 괴담이 만연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깔끔히 세탁해 판매해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닌 듯하다.) 이전에 이 옷을 입었을 이의 기억을 입는다. 새 것의 광택은 없다 해도 시간의 때가 묻어 반짝반짝 빛난다. 몇 백 만원을 호가하는 구찌의 실비백은 아니지만, 버버리의 트렌치코트는 아니지만 그것만큼이나, 아니 그것의 몇 배의 가치와 연륜을 자랑한다. 수수하고 주름진 것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Google Image
에디터 10기 신예린


[신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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