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아는 게 중요하진 않잖아요! [시각예술]

<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이 말하는 사랑의 방법론
글 입력 2017.05.22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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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장 흔히 쓰이는 뜻으로 보면, “안다”는 “면식이 있다”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좀 더 심화된 의미로, 상대방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게 되면, 그의 성격이나 취향, 행동 습관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나아가 그 사람의 감정이나 행동을 예측하기까지 하게 된다. 어떤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는 채로 그에게 어떤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알아 가는 과정은 서로가 더욱 친밀해지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 때 “안다”는 행위는 보통 긍정적인 의미로 여겨지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때로는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안다”고 생각하는 그 행위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영화 <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은 그 지점을 지적하고 있는, 앎과 사랑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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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영수의 아는 형 중행이 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영수와 다섯 잔까지만 먹기로 약속한 그녀가 “만취한 채로 다른 남자와 싸웠다”는 말을 지인에게 전해 들은 중행이 그것을 다시 영수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중행은 자신도 전해들은 것이지만 “여러 사람한테 들었다”고 말하며, 은근슬쩍 사실임을 고집한다. 영수도 처음에는 “나는 안 마신다고 믿고 있다”고 하지만, 곧 “물어봐야겠네”라며 중행의 말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민정을 만나 술을 먹은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던 영수는, 민정이 아니라고 하자 인정하라며 그녀를 다그치고 민정은 화가 나 영수의 집을 나간다. 그리고 그 이후 영수는 민정과 연락이 끊겨 다친 발로 동네를 누비며 그녀를 찾아 다니고, 그 장면들 사이로 민정의 얼굴을 한 여자가 두 명의 남자들을 만나는 내용이 삽입된다. 생김새는 영락 없는 민정인데, 그녀는 민정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가, 쌍둥이 동생이라고 하는 등 애매모호한 행동으로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관객까지 헷갈리게 만든다. 민정의 얼굴을 하고 민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여자의 정체를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극이 끝날 때까지 이름도 나오지 않는 그녀의 이름을 내 마음대로 지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으니 민영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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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은 한사코 자신이 민정이 아니라고 하지만, 두 남자 입장에서 그들과 민영의 연결고리는 어찌 됐든 민정이다. 첫 번째 남자 재영이나 두 번째 남자 상원 둘 다 과거 민정과의 인연으로 민영을 “알고 있다” 생각하며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하고 함께 술을 마신다. 상원과 함께 있는 민영은 심지어 재영을 모르는 상태이다(혹은 그렇게 주장한다). 그녀의 이름을 다시 민지라고 불러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지만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그냥 민영이라고 하겠다. 민영을 둘러싼 상원과 재영의 대화는 온통 “아냐”, “모르냐” 투성이다. 상원은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 하냐.”, 민영은 “저 모르는 사람인데요?”, 재영은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 계세요.”. 한참 말씨름을 하다가 둘은 자신들이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너 상원이 아냐?” “나 알아?” “나 재영이.” “재영이? 알지.”

 민영을 가리키며 누군지 아냐는 물음에 재영은 안다고 대답하고, 민영은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뜬다. 두 남자는 “아는” 얘기를 하며 회포를 다지고, 민영은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두 남자에게 “아는 척” 사례를 당하던 민영은 엉엉 우는 상태로 영수에게 발견되고, 드디어 “안다”가 아니라 “알고 싶다”는 말을 듣게 되어 마음을 연다. 둘의 차이는 문법적으로는 사소하지만, 작품에서는 민정과 민영을 가르는 포인트가 된다. “알고 싶다”는 말에는 상대방을 다 알지 못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안다”라는 말에는 상대방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는 자신감의 뉘앙스가 존재한다.

 사랑에 있어서 이 “안다”라는 개념은 일상에서 쓰이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복잡한 의미로 사용된다. 에리히 프롬은 < 사랑의 기술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알고자 하는 나의 욕구는 일치에 의해 충족된다. 융합의 행위 속에서 나는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며 모든 사람을 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사고가 제공할 수 있는 어떤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일치의 경험을 통해서만 나는 인간에 대해 살아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중략)

낯선 사람이 친밀하게 아는 사람이 되고 나면 더 이상 극복해야 할 장벽도 없고, 갑작스런 친밀감도 더 이상 없게 된다. ‘사랑 받는’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잘 알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이런 상황을 혹은 거의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문장에서 말하듯, 상대방에 대해 쉽게 알게 된다는 것은 오히려 모른다고 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자만이며 착각일 것이다. 자신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하는 인간이, 자신만큼이나 오랜 세월 동안 거대하게 자란 자기 세계를 가지고 산 사람을 단 몇 년, 몇 개월 만에 끝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특히 사랑의 열정에 휩싸인 연인들끼리는 상대방에 대한 몇 번의 경험으로 그를 많이 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일치의 경험이란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알고 싶은 마음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할수록 더 많이 알게 된다. 한 사람을 결코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할수록 그의 새로운 면모를 깊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에서, 영수 주변 사람들의 “말”과 그로 인한 영수와 민정의 관계, 다른 두 남자와 민정의 관계는 “아는” 것에 해당한다. 말이나 과거는 어떤 사람의 일부는 될 수 있지만,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그 사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당신의 것”이 곧 “당신 자신”이 아닌 것처럼. 동네 사람들의 소문에 휘둘린 영수는 ‘’ 때문에 모르는 것에 대해 안다고 오해를 하고, 민정이라는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민정이 없는 곳에서 그녀를 “알고자 하는” 긴 방황을 거친 끝에, 그는 알고 싶은 여자 민영에게 말한다. “제가 뭘 안다고 생각하고 뭘 하려고 했던 건 다 실패했고요, 이젠 다 방해만 될 뿐이에요. 정작 당신을 놓쳤어요.” 그는 민영을 모른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민영은 대답한다. “전 원래 그렇게 살았어요.” 이로써 민영의 존재는 가짜가 아니라, 민정의 새로운 모습으로서 진짜가 된다.

 이 아리송한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각자가 “당신의 것”에 가지고 있는 환상을 버리고, 그에 가려진 “당신 자신”을 보라는 사랑의 방법론이다. “우리가 아는 게 중요하진 않잖아요!” 라고 말하던 민정처럼 사랑해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새로운 모습들에 기대하며, 매일 그것을 경험하는 기적을 바라기도 하면서. 사랑에는 정석이 없다고 하지만, 서로의 허상 속에 갇혀 있는 연인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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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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