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환상을 걷어내도, 영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

글 입력 2017.05.09 18:16
댓글 1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얼마 전에서야 영화 <라라랜드>를 봤다. 최근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영화이니만큼 꽤 많은 글들이 이곳 아트인사이트에도 올라왔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지만 <라라랜드>는 나에게도 흥미로운 감상을 선사했기에 이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대단하지는 않으나, 그런 것들을 쓰는 게 ‘보암보암’의 목적이니 이유는 충분하다.
 처음엔 <라라랜드>가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줄 알았다. 될 수 있으면 스포일러가 될 만한 글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고 다들 ‘환상적’이었다고 하기에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제목이 주는 느낌도 그렇지 않은가. 라라랜드. 로스앤젤레스의 별명이라고도 하는 이 단어는 '현실과 동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뭔가 디즈니랜드처럼,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모른 척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이야기를 보여줄 거라 확신했다.


라라랜드1.jpg

 
 재즈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배우가 되기 위해 쉴 새 없이 노력하는 미아(엠마 스톤)은 여느 러브스토리 주인공들이 그렇듯 우연의 연속으로 만남을 시작한다. 그들에겐 각자 간절히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었으며 힘들 땐 서로에게 의지하고 기쁜 일엔 함께 기뻐하는 동안, 사랑은 마치 성장기의 어린아이처럼 무럭무럭 자란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에겐 각자의 꿈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미아는 자신의 연극을 보러 온 한 캐스팅 디렉터에 오디션 제안을 받았고 계획대로라면 촬영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나야했다. 세바스찬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아는 세바스찬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한다.


라라랜드2.jpg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거야
I'm always gonna love you


 그녀의 발언이 경솔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곧바로 이어지는 5년 후의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 특히나, 둘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이는 많은 이들의 기대와 예상을 산산조각 내버린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인공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당황했던 건 영화 전반에 걸쳐 보는 이의 환상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준 <라라랜드>가 갑자기 흐름에 맞지 않는 결말을 떡하니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movie_image.jpg

 
 다른 이들은 라라랜드의 어떤 장면에서 환상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세바스찬과 미아가 노을 앞에서 탭댄스를 추는 장면이 환상적이었을 수도 있고 우주의 바다 속에서 그림자가 되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영화의 맨 첫 부분, 보기만 해도 지루한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음악, 춤, 그리고 사람들이 터져 나온 장면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세바스찬과 미아의 관계도 드라마틱했다. 우연한 만남, 운명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사랑, 꿈을 향한 발걸음. 두 사람이 헤피엔딩을 맞이했다 하더라도 진부하다는 이유로 비난받기보다는 대중들이 가진 고전적인 환상에 업혀 자연스럽게 흘러갔을 것이다.


라라랜드3.jpg

 
 그런데 <라라랜드>는 ‘굳이’ 두 사람을 이별시켰다. 심지어 미아는 배우로써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결혼도 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는데 반해 세바스찬은 원하던 재즈 바를 열긴 했지만 그 바의 이름은 Seb's(미아가 지어준 가게 이름)인데다 결혼을 하지도 않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환상적이고 완벽한 사랑이었는데, 끝에 가서 보니 가혹한 현실이었다. 영화가 끝이 났을 때, 꿈을 꾸는 듯했던 장면들이 찬물을 끼얹은 듯이 착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결말 전까지만해도 환상을 그리는 데 치중했던 <라라랜드>는 환상을 만족시켜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실상 광고, 영화, 드라마 등 각종 대중매체는 사람들의 환상을 이용해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자 연예인들처럼 마르고 볼륨감 있는 몸매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 어른이 되면 누구나 멋있는 전문직 종사자가 되어 휴가 때마다 호화롭게 해외여행을 다닐 수 있을 거라는 환상.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 무엇보다도 영원한 사랑 혹은 운명적인 사랑에 있어서 대중들은 그것이 얼마나 실현하기 어려운가를 몸소 체험해봤거나 지켜봤음에도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
 형태가 변하든, 방법이 변하든, 대상이 변하든, 아니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든 사랑은 고정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며 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세상에 환상적인, 영원한, 그리고 완벽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사랑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추앙한다. 다수의 작품들은 이러한 허상을 더욱 다채롭게 채워주기 위해 다양한 설정을 통해 다양한 모습의 환상을 만들어왔다.

 
라라랜드5.jpg

 
 하지만 <라라랜드>는 조금 달랐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환상의 막을 마구 펼쳐놓은 다음 그것을 한방에 걷어내 현실을 선명히 드러냈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환상의 늪에 깊숙이 집어넣었다가 갑자기 끄집어내 버렸다. 사랑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슬프거나 무기력한 무언가로 표현하지도 않았다. 물론 매순간 조금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지,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면 어땠을지를 파노라마처럼 쭉 보여주긴 하지만 배경음악은 꽤나 유쾌하다.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게 환상적인 사랑이었다면 결말이 이렇지도 않았겠지만 그들의 후회, 아쉬움 같은 것들이 담겨있었을 일련의 장면들을 신나고 즐겁게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라라랜드7.jpg
 
라라랜드6.jpg

 
 한때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던 그들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다. 다만 Seb's를 나서던 미아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고 세바스찬 역시 미아를 바라본다. 그저 조용히 눈빛만으로 상대를 어루만지던 그들은 살며시 웃어 보인다. 거기엔 ‘고생했어, 축하해, 여전히 아름답고 또 멋있구나, 고마워, 미안해, 괜찮아, 잘 지내, 반가웠어’ 와 같은 수많은 말들이 담겨있다. 그들도 깨달았을 것이다. 모든 시련과 난관을 극복할 만큼 우리의 사랑이 대단한 게 아니었다는 걸. 미아는 언제까지나 세바스찬을 사랑할 수 없었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환상을 깨뜨림으로써 영화는 과거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함께 우주를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던 그들의 사랑도 사실은 현실이었음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의 사랑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막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끝이 났다고 해서 누군가를 사랑했던 과거가 물거품이 되는 건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기억 속에 온전히 어여쁜 환상으로 남으며, 그래서 세바스찬과 미아는 서로 다정한 침묵을 건네며 미소지을 수 있었다.
 <라라랜드>는 말도 안 되는 허상을 만족시켜주는 대신 훨씬 가능성이 높지만 사람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사랑의 끝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행복에 취해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 드는 건 환상적인 사랑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환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에요. 완벽하지 않은데도 영원하지 않은데도, 그 순간만큼은 완벽하고 또 영원한 건 그래서에요.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돌이켜보면 참 반짝이지 않나요. 아득한 옛날처럼, 흑백 영화처럼, 문득 액상 위로 떠오르는 필름 조각처럼, 어젯밤 희미함만 남은 꿈처럼. 그런게 사랑이에요. 환상을 걷어냈는데도 아름다운 이 영화가 나는 그래서 좋았다.




보암보암?   
: 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감정과 느낌의 응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화예술로부터
감정과 느낌이 가진 모습들을 평범하게, 동시에 독특하게 풀어내어
보암보암이란 이름처럼 따듯하고 몽글몽글한 글을 써보려 합니다.




아트인사이트 tag.jpg


[반채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10
  •  
  • hah4941
    • 글을 읽고 나니 우리가 관계를 맺어가면서 형성하게 될 다양한 추억들만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는데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 1 0
    • 댓글 닫기댓글 (1)
  •  
  • 반달곰
    • 2017.05.30 01:34:13
    • |
    • 신고
    • hah4941피드백 감사드립니다.결말이 어떻든 추억은 지나고보면 아름답고 그래서 힘이 되어주는 거 같아요.
    • 0 0
  •  
  • 에밀리
    • 저는 라라랜드를 처음 보았을 때 제가 생각했던 결말과 달라서 허무(?)해하며 극장을 나왔는데, 그러고 나서도 가끔씩 그 영화가 생각나더라고요. 왜 그럴까 궁금했었는데, 채은님 글을 보면서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사랑의 현실적인 결말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아름답고 아련하게, 환상적으로 그려낸 감독의 솜씨가 탁월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사랑에 끝이 있고, 이별이 있고, 무뎌짐이 있기에 그것이 더 아름답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요? 채은님의 글을 읽으며, 라라랜드가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 '보암보암'이라는 컨셉에도 잘 맞는 글이라 생각해요. 예술을 보며 느끼는 두루뭉실한 감정을 잘 정리된 글로 풀어내기 쉽지 않은데 이 글은 그런 의미에서 잘 쓴 글이라 생각합니다!
    • 1 0
    • 댓글 닫기댓글 (1)
  •  
  • 반달곰
    • 2017.05.30 01:39:20
    • |
    • 신고
    • 에밀리피드백 감사드립니다! 환상적인 사랑과 사랑의 환상성이라는 말장난 같은 이야길 하고 싶었고 잘 전달이 됐을런지 굉장히 궁금했는데 공감 해주시는 분이 한 분 더 늘어나 큰 힘이 됩니다. 다시 한 먼 감사드립니다.
    • 0 0
  •  
  • Danny
    • 안녕하세요! 기고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의 환상을 걷어냈는데도 아름답다는 말이 참 공감이 되요~라라랜드가 좋다는 평만 듣고 내용 하나 모르고 보러갔는데 의외의? 결말에 놀랐지만 오히려 더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요ㅎㅎ
    • 0 0
    • 댓글 닫기댓글 (1)
  •  
  • 반달곰
    • 2017.06.26 17:37:45
    • |
    • 신고
    • Danny답변이 많이 늦었습니다. 피드백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감상을 나눌 수 있어 즐겁네요 ㅎㅎ
    • 0 0
  •  
  • 갈매나무
    • '행복에 취해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 드는건 환상적인 사랑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환상을 민들어냈기 때문이에요' 이 부분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공감도 많이 되고요. 저는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이 가장 좋았는데 사실 왜 좋았는지 말하려면 참 어렵더라고요. 이 글을 읽고 나니 왜 좋았는지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실적인 사랑'과 '환상적인 사랑'이 완전히 나뉘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둘 모두가 사랑의 여러 모습들 중 하나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 0 0
    • 댓글 닫기댓글 (1)
  •  
  • 반달곰
    • 2017.06.26 17:40:57
    • |
    • 신고
    • 갈매나무갈매나무님 안녕하세요! 답이 많이 늦었네요. 특정 문장까지 언급해 공감이 된다고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ㅎㅎ 글을 쓰면서 그냥 말장난 같진 않을런지, 감상이 잘 전달될런지 걱정이 됐었거든요. 다시 한 번 피드백 감사드립니다!:)
    • 0 0
  •  
  • 오리
    • 안녕하세요! 제가 아트인사이트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보암보암'글을 읽으며 많이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라라랜드의 글도 제가 배워갈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소재에 대해 글을 쓸 때면 저는 참 많은 부담을 느끼는데요, 반채은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글을 쓰신 것 같습니다.^^
      라라랜드를 명성을 듣고 영화를 관람하러갔는데 저는 영화 중반부까지 참 진부하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느꼈던 감동과 환상적임을 못느끼고 있었는데 후반부에서 왜 이 영화가 찬사를 받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반채은님께서 쓰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환상을 걷어버린 현실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꿈이 더 중요했다기 보다 서로를 너무 사랑하다보니까 서로의 꿈을 저버리는걸 서로가 견디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사랑하는 사람의 꿈을 다 포기하고 나만을 바라봐주길 원하는 마음을 강요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영화를 보고 한참 있다 라라랜드에 대해 다시 생각 해보니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었던 결론은 사실 현실적이지 않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슬픈 이야기지만 미아와 세바스찬은 꿈을 이루게 된 반면 현실에서는 사랑을 포기하고 꿈을 이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들은 사랑을 포기한 이 영화를 보고 환상적이다, 감동적이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라라랜드는 영화 하나만으로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공유할 수 있게 해준 멋진 영화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0 0
    • 댓글 닫기댓글 (1)
  •  
  • 반달곰
    • 2017.06.26 17:43:53
    • |
    • 신고
    • 오리오리님 안녕하세요, 답이 많이 늦어졌네요. 두레이기 때문이 아닌 보암보암 자체에 관심을 가져주셨다고 하니 정말 뿌듯합니다 ㅎㅎ 저 역시 오리님의 의견에 공감이 가요. 영화로 치면 비교적 현실적인 결말이지만 사실 현실에선 사랑을 포기하고도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것 같습니다. 또 한 분의 의견과 생각을 들을 수 있어 즐겁습니다. 피드백 감사드립니다!:)
    • 0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