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나는 오늘 어떤 누구와 공연을 하는 날인가

글 입력 2017.05.01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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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에 다른 글에서 고백한 바 있지만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나는 이병률 작가의 산문집을 좋아한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왠지 그와 친구가 된 기분이다. 이병률 작가에 대해 아는 거라곤 책에 실린 프로필 사진, 그가 찍은 세계 각국과 일상 속 사진들, 그의 감성이 덕지덕지 묻은 글뿐이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전부라는 생각. 철저한 독자의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보고, 또 읽기만 했을 뿐인데 어느 샌가 마음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그의 마음을 똑똑, 하고 두드려보고 싶어지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기억력이 제로에 가까운 사람인데도 가끔 그의 산문집에서 읽은 몇 편의 글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내 멋대로 그는 친구라 그렇다. 친구의 글은 쉽게 잊히지 않아서 시험이다 과제다 해서 바삐 움직였던 최근 몇 주 동안에도 글 하나가 떠올라버렸다.


 저자는 한 공연의 여주인공과 대화를 나누다 더블캐스팅에 대해 묻는다. 어떤 날은 A와, 어떤 날은 B와 공연을 하는데 A와 B는 좀 다르지 않느냐고. 그러자 그녀는 말한다. B는 공연 때마다 자신과의 간격도, 대사의 쉼표도, 눈 맞추는 타이밍도 항상 다르다고. 반면 A는 동선과 타이밍 모두 정해진 대로만 해서 가끔은 힘들다고 말한다. 그날그날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도 해보고 싶은데 A와 공연을 하게 되면 기계적으로 맞춰야 하기 때문에 몰입이 쉽지 않다고. 여주인공의 답이 끝나자 작가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우연히 A를 마주친다면 A는 “잘 지내지요?”하고 스칠 것 같지만 B는 “지금 바빠요? 어디 들어가서 우리 잠깐 뭣 좀 마셔요”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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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년을 제멋대로 보내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휴학을 하고 난 뒤의 나는 많이는 아니지만 아주 조금 변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사물도, 환경도 당연히 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좋든 싫든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지만 나를 대하는 다른 이의 태도가 변하는 것에는 유별나게 이질감을 느꼈다.
 대학 사람들에게 애정이 각별한 탓이었을까, 쓸데없이 잘 웃는 습관 때문이었을까, 딱히 친하지 않아도 연락이 오면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가 신이 나서 주절거린 게 독이었을까. 나처럼 학교를 떠나 있어 만날 사람이 많지 않을 땐 그리도 만나자고 찾던 사람이 이제는 밥 먹자고 먼저 연락을 하면 달가워하지 않았다. 꼭 다른 사람도 부르자고 하더라. 그러면서도 과제나 시험에 관해서 궁금한 게 생기면 아랑곳 않고 찾아왔다. 남자들은 군대에, 여자들은 교환학생이나 휴학 때문에 텅텅 비어있던 강의실이 이번 학기부터는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지만 변해가는 한 사람의 모습 때문에 가슴은 구멍이 숭숭 뚫린 것처럼 헛헛해졌다.
 그 사람에게 내가 처한 상황이나 기분을 고려해야한다는 의식이나 양심 따위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겉으로만 단단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얘기하지 않으면서 독심술이라도 부려 속마음을 알아서 봐주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배려를 바랐다. ‘너만 보면 아쉽잖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 쟤 보러 온 거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쯤은, 만나서는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는 행동이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쯤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기에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배려 따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존재라는 게 분명해졌고 또 수치스러웠다. 다짜고짜 찾아와 신세 한탄을 하고 볼 일이 끝나면 홀연히 떠나도 좋은 감정쓰레기통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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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보다 더 뭣도 몰랐던 스무살, 술자리에서 과 조교 언니가 미간에 한껏 주름을 잡으며 대학에서 진짜 친구는 지금 옆에 있는 친구가 아니라 졸업할 때 옆에 있는 친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과를 졸업한 선배님이기도 하고 세상 풍파 다 겪은 말투로 그런 말을 하기에 공감은 별로 안 됐지만 그런가보다 했었다. 그런데 그 말은 이제 조교 언니에게서 내게로 옮겨와 하나의 진리가 되었다.
 뒤를 이어 들어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잠시 잡아주고, 누군가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때 대신 들어주는 것도 배려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배려는 타인의 감정과 상황을 한 번 쯤 생각하는 태도라는 걸, 이렇게 한참을 아프고 나서야 알았다. 배려가 없는 누군가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시간이 흘러 졸업을 해도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지 않으리라는 게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나와 친할 수 없었다. 이병률 작가보다도 더.

 A와 B에 대한 여주인공의 평가만으로 두 사람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작가의 상상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설사 여주인공의 대답이 사실이라고 해도 A가 잘못했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다. A는 주어진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했을 뿐이니 말이다. 변화와 불안정성을 좋아하지 않는 이라면 A에 더 호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A보다는 B라는 사람에 더 끌린다. B가 여주인공과 무대에 오를 때마다 다른 간격, 다른 휴지, 다른 타이밍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건 매순간 여주인공의 기분과 감정을 배려해서였다. 배려에서 출발한 B의 행동은 여주인공과 보다 깊은 교류를 이끌어냈고 그래서 여주인공은 A보다는 B와 더욱 호흡이 맞는다고 느꼈다. 저자의 상상에 나의 상상을 살짝 보탠다면, A는 나와 마주쳤을 때 내 기분이 어떻든지 간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B는 내가 웃는 얼굴이면 ‘오늘 무슨 좋을 일 있어요?’하고, 내가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으면 ‘힘든 날인가보네요. 잠깐 바람 쐬러 가실래요?’ 하고 말이라도 건네줄 것만 같다. 반대로 나 역시 A보다는 B와 있을 때 보다 솔직해 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안부, 감정, 생각에 B가 관심이 있으리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B는 그런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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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산문집 <내 옆에 있는 사람>에 실린 이 글의 제목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것이 크게 다른 날들’이다. A와 B는 다른 사람이긴 하지만 같은 배역이기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 그 차이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들과 직접 대면하고 호흡하는 사람은 안다. 배려의 존재가 A와 B 사이에 상당한 간극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걸.
 저자는 이 글의 끝에서 묻는다. 오늘 나는 어떤 누구와 공연하는 날인가. 나하고 잘 맞는, 내 맘을 알아주는 사람과 무대에 서는 날인가. 여기에 더해 나는 오늘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되물어본다. 배려를 받을 만한 사람이었는지,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지. 그에 따라 오늘 하루가 크게 다른 날이 될지도 모르니까.




보암보암?   
: 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감정과 느낌의 응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화예술로부터
감정과 느낌이 가진 모습들을 평범하게, 동시에 독특하게 풀어내어
보암보암이란 이름처럼 따듯하고 몽글몽글한 글을 써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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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이미지 발췌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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