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스쳐간 당신의 흔적에 남지 못한 목소리: 『타인의 고통』 [문학]

글 입력 2017.04.30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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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




희미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남기며
당신은 기어이 내게 등을 돌렸다
암실이 돼 있는 서쪽으로 천천히 뚜벅뚜벅,
이후로 당신을 만나려면 사진으로만 만나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당신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이런 그동안 뭐했나,
뭐였나, 서로에게 우리는

- 김충규, ‘뭐였나, 서로에게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끝까지 읽고 나서, 위의 시가 생각났다. 당신이 떠나가고 남은 자리에 당신과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기록을 상징하는 것, 즉 사진조차 남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의 화자는 그러한 최소한의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 ‘나’와 ‘당신’의 관계는 결국 무엇이었던 거냐고 묻는다. 그 물음은 결국 당신 역시 흐려져 갈 수 밖에 없다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슬픔과, 당신의 아주 작은 파편조차 남지 않았다는 고통스러움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이 시가 일차적으로 역설적인 것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나와 당신의 관계는 결국 결코 이해 할 수 없다는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저자는 그 ‘알 수 없음’ 이야말로 타인과 나 사이의 관계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알 수 없다는 것이 관계의 결론 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을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결론이라면, 우리는 왜 타인에 대해서, 특히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걸까? 더욱 극단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타인에 대해 가지는 관심은 박물관을 구경하거나, 수족관을 구경하는 것처럼 관조적인 영역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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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에 등장하는 충격적인 사진들 중의 하나 > 


 이런 의문은 사실 너무나 결과론적이다.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역시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가 아니다. 저자는 작품의 대부분의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한 저널리즘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설명한다. 그녀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타인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사진들이 단순히 충격이나 불쾌함을 주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획일화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인상을 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그 인상들이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쾌감이나, 타인과 나의 고통의 비교를 허락하지 않으며 불쾌하게 여기는 모습 등 오히려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그 잔인함에 무뎌지는 의식이 무언가를 비판하는 법을 잊어버리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국에서는 미국과 관련 없는 전쟁의 사진들이 주로 전시되고, 그들을 타인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불편함을 해소하려 한다는 부분에서, 사람들은 결국 돌고 돌아 단순한 논리를 선호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 부분에서, 분명 종군기자들의 저널리즘이 타인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인지, 혹은 그 역시 누군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큰 그림’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전쟁이 나쁘다’, 그리고 ‘나는 가해자가 아니다’ 라는 논리를 가지고, 누군가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이 무수히 많은 시선들 중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리고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저자는 이런 논리가 더 이상의 사고를 멈추게 만드는 상황을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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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고통』의 도입부에서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빌어, ‘우리’와 ‘타인’ 이라는 관계 정립에 대해서도 역시 너무나 쉽게 타인을, 그리고 ‘우리’를 정의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한다.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 해서는 안 된다.’(p.23)는 것이다. 어떤 연유로 우리는 우리를 우리라고 칭하는가? 그리고 또 어떠한 연유로 우리는 그들을 타인이라 칭하는가? 그 경계는 너무나 모호하다. 모호하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에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나는 결코 당신을 전부 다 알지 못한다. 당신을 나타내는 몇몇 사진들이 당신에 대해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당신이라는 사람을 아무리 열심히 표현하고 전하려 한다 해도 언제나 결코 이해하지 못할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당신이 보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안간힘을 써야한다. 서로에게 가 닿지 못하고 사라지는 그 무수히 많은 신호들을 조금이라도 더 잡기 위해서.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서로를 찌르는 것들에 대해 언젠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알 지 못한다 할 때, 그것이 당신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우리가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책에서 이 점을 모호하게 처리하였으나, 적어도 나는 희망적인 전망을 하고 싶다.

 마치 수면을 떠나 점점 더 멀리 나아가는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이, 망원경을 들어 육지에 있는 사람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매 순간, 내가 보고 있는 망원경의 초점은 틀린 것이 된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종류가 나는 결코 알지 못할 것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끊임없이 초점을 맞추려 노력해야 한다. 나를 찌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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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나는 아파하고 있는 당신을 단지 스쳐 갔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쫓는 것은 당신의 흔적일 뿐이다.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언제나 당신의 고통스런 시간의 한 줌도 되지 않는 찰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스쳐간 당신의 흔적에 남지못한 목소리를 찾아 헤맨다.


[최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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