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리플리 [영화]

집착적 실존
글 입력 2017.04.29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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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alented Mr. Ripley
감독 : 안소니 밍겔라
 
1955년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발표한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를 원작으로 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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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는 딕키의 삶의 모든 부분, 그의 모든 삶의 양식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그만을 직시하며 그의 체취부터 그가 지니고 있는 작은 소유물, 그의 연인까지 모조리 흡수하고 싶을 만큼 그를 사랑한다. 리플리는 사랑한다고 고백하였으나 아마 이는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것이다. 리플리는 딕키라는 대상에게 집착하고 기존의 그 자신을 점점 더 뻔뻔하게 망각하며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 그로서는 단 한 번도 비슷해질 수도, 가까워질 수도 없었던 딕키, 즉 다름의 대상에게 집착한다. 리플리는 딕키라는 완전히 새로운 것, 자신이 결코 가지지 못한 것, 가질 수 없던 것들로만 이루어진 딕키라는 존재를 추구하며 그 자신의 현존재를 부정한다.
 

현존재는 단지 탈-존할 뿐 아니라 동시에 집착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현존재는 마치 스스로 그 자체로 열린 듯 보이는 존재자가 제시하는 것을 강력히 고수하면서 존립하고 있다.
 
_ 하이데거 『이정표』, 이선일, 2005.


리플리의 현존재의 부정은 탈-존이지만 사실은 집착이다.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망각되었다고 여겨지는 존재, 그러니까 그의 본질, 곧 진리는 ‘망각되었다’라는 존재자의 은폐성을 이용해 더욱 강렬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망각하려고 하면 할수록 무엇과도 뒤섞일 수 없는 존재 그 자체로 스멀스멀 리플리의 내면을 잠식시킨다.
본질적 존재는 그와 완전히 다른 존재, 결코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없으리라 보이는 대상에 집착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본질은 본질로서 더 뚜렷하게, 그러니까 은폐된 존재자의 척도를 결코 부러뜨릴 수 없도록 구축하고 있다. 탈-존은 겉보기에는 다른 대상 속에서 본질을 녹여 없애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 탈-존의 시도(‘나와’ 다른 대상으로 귀납하고자 하는 시도)가 거듭될수록 ‘나’라는 존재의 본질성은 살아나는 것이다.
리플리는 완벽한 탈-존을 위해 대상에 집착하고 자신이 그 대상이 되고자 대상, 즉 딕키의 삶을 가장하기에 이르렀지만 그는 결코 그의 은폐된 실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의 은폐된 실존은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현존재의 대척점에 놓인 대상, 딕키를 사용해 딕키의 모습을 흉내 내도록 하고 은폐된 실존은 반대 방향을 향해, 또는 깊은 지하실을 향해 숨어 들어간다. 그리고 그의 가장을 폭로하고 현존재에게 은폐된 실존을 자각시켜 그로부터 현존재를 도망치게 만드는 것들을 위협하고 배제시킨다. 그의 내면 가장 깊은 속의 비밀인 바로 그 은폐된 실존은 더 어두운 곳으로 기어들어가며 결코 밖으로 내던져질 수도, 누군가에게 발견될 수도 없이 마치 지하실의 어둠 그 자체로서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영영 창고에 갇힐 거야. 그 어둡고 무섭고 외로운 창고. 난 거짓말을 했어. 내가 누군지. 내가 어디 있는지.
 
_ 영화 중 리플리 대사

 
그의 실존은 그 어둡고 무섭고 외로운 창고 속에 영영 갇힐 것이고, 거짓말을 했다는 때 늦은 고백이 그의 실존이 숨어 들어간 지하실 문을 두드리려 해도 이미 은폐된 실존은 그까짓 두드림은 들을 수도 없을 만큼 깊은 곳으로 기어들어간 지 오래다.
 
나는 이런 리플리의 극에 치닫는 탈-존의 욕구, 대상을 가장하고 그 가장의 무대를 위협하는 존재들을 살해하기에 이르는 이 극에 치닫는 탈-존의 욕구를 본인의 존재를 향한 집착에서 발생한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위에서 리플리의 행위를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하였는데, 이 집착이 곧 강력한 나르시시즘적 집착이라는 것이다. 결코 대상 혹은 타자를 향한 집착이 아니라 그 자신을 향한 집착의 발현이다.
탈-존 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럴수록 본인의 존재를 향한 집착은 동시에 발생한다. 존재를 잊으려 하는 바로 그 순간 존재를 떠올리듯. 리플리는 강렬하고 집요하게 탈-존을 욕망한다. 지나칠 만큼 병리적으로 욕망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함께 부풀어가는 본인의 존재를 향한 집착은 리플리의 나르시시즘적 자아를 구축한다.
 
타자로 향할 수 있는 주체는 그와 타자를 구분 짓는 경계에 부딪혀 까질 수밖에 없다. 그 경계선에 까지는 것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주체 본연이 지닌 경계, 그러니까 주체의 영역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자면 나르시시즘적 자아는 자신에게만 몰두하여 타자와 부딪히지 않기에 그 자신의 영역, 그 경계선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결국 그 범람한 자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익사한다.
리플리의 나르시시즘과 집착적 실존이 만났을 때, 리플리의 자아는 탈-존 하고자 하는 욕망은 이미 집어삼켜졌다. 그의 내면 깊숙한 곳, 실존에 대한 집착은 그 실존을 은폐할 수 있는 좋은 지하실을 만든다. 그의 나르시시즘적 집착적 실존은 그 주체의 경계를 알지 못하는 만큼 오직 그 주체만의 무한성 안에서 실존이 만든 척도에 따라 대상을 정하고, 바로 그 대상 딕키를 도구로 사용해서 실존의 은폐성, 그러니까 실존이 숨어 지낼 수 있는, 그 누구도 실존을 해칠 수 없는 견고한 지하실을 깊이, 더 깊이 파내려간다.

 
그러다 특별한 사람을 만나면 그 열쇠를 주고 싶어지지. ‘열고 들어가 봐’ 하지. 그런데 그럴 수 없어. 너무 어둡고 악마가 있으니까. 얼마나 추한지 누가 본다면. 난 늘 그러고 싶어. 문을 활짝 열고 빛을 들여서 모든 걸 쓸어버리고 싶어. 큰 지우개로 모든 걸 지울 수 있다면 나 자신부터 지울래.
 
_ 영화 중 리플리 대사
 

탈-존하면서 현존재는 집착하고 있다. 집착적 실존에서도 비밀은 지배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나 그러나 이러한 비밀은 진리의 망각된 본질, 따라서 진리의 >비본질적이게< 된 본질이다.
 
_ 하이데거 『이정표』, 이선일, 2005.
 

리플리는 고백한다. 그 실존이 어느새 자신을 집어 삼키는 악마라고. 리플리는 알고 있는 걸까. 그의 그러한 비밀이 어느새 진리의 비본질적인 본질이라는 사실을. 그가 그렇게나 집착하는 본인의 자아, 본질은 비본질적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는 열쇠가 없다.


[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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