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연한 것은 언제부터 당연했나? – 웹툰 ‘판도라의 선택’ [문화전반]

글 입력 2017.04.2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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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블레이, 내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내게 “세상”이란 열 두 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을 의미했다. 내 이름은 판도라, 크리스토퍼 블레이의 못생긴 딸.

- 웹툰 <판도라의 선택> 1화 중 서술부 발췌



<판도라의 선택>은 레진코믹스에서 매주 일요일에 공개되는 웹툰이다. 제 2회 레진코믹스 세계만화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이며, 27화까지 올라와있고 4월 23일 기준, 19화까지 무료 공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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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의 주요 인물은 주인공인 ‘판도라’와 그의 아버지인 ‘크리스토퍼 블레이’(이하 크리스)다. 미국의 부유층에 속하는 ‘크리스’는 파리 유학 당시 고위급들만 상대하던 고급 창부 ‘베로니카’에게 반한다. 다른 상대와 있던 중에 마차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잃은 그녀를 ‘크리스’는 미국으로 데려온다. ‘베로니카’는 프랑스와 중국인 혼혈이었다. 둘의 딸인 ‘판도라’는 1830-40년대 당시 미국에서 배척하던 ‘유색인 여성’이며 그를 한마디로 축약해 ‘크리스토퍼 블레이의 못생긴 딸’로 정체성이 규정된다.



제이미 듀랜드,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다. 제이미는 예쁘게 생겼다. 나는 예쁜 것들이 싫었다. 예쁜 것들을 보고 있으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떠올랐다. 주말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라든가, 엄마와 함께하는 오후의 산책, 해바라기 꽃잎 같은 머리 색, 내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들.

- 웹툰 <판도라의 선택> 1화 중 서술부 발췌



‘못생겼다’는 언급은 판도라에게 단순한 놀림거리 이상으로,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다가온다. 크리스를 비롯한 주위 어른들이 판도라의 엄마는 ‘예뻤다’고 얘기만 해줄 뿐 실제로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남 미녀인 부모 사이에서 ‘못생긴’ 딸이 태어났다. 판도라는 자신의 출신 자체를 의심하며 아름다운 모든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진다. 출신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에 소녀는 어렸고, 그런 판도라를 감당해야 하는 유일한 존재인 크리스는 자신의 상처조차 어쩔 줄 모르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둘은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면서도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로 애증의 공존을 이어간다.
 
크리스는 1840년대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유색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판도라만큼 이질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가업으로 축적된 재산을 소비할 뿐 어떠한 경제활동도 하지 않으며, 사교계 활동이나, 종교활동 역시 하지 않는다. 베로니카의 죽음 이후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추정되나, 그녀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적어도 내가 본 부분까지는) 아직 웹툰에서 명확히 그려지지 않고 있다. 어떤 다른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책 속에만 틀어박힌 아빠의 모습을 판도라는 “낱말들 사이의 빈틈 속에서 쉴 곳을 찾”는다고 묘사한다.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관습적이고 반종교적인 크리스와의 존재는 판도라를 더욱 이질적인 존재로 성장시킨다. 아빠의 모습으로부터 독서를 배운 판도라는 또래보다 많은 생각을 가지게 된다. 많은 생각은 곧 많은 의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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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툰 <판도라의 선택> 9화 중 일부 캡쳐


등장하는 남자는 크리스의 친구이자 주치의인 듀랜드라는 인물로, 전형적인 미국적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다. 그는 인종차별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규정지으며, 말대꾸하는 아내에게는 망설임 없이 손을 댄다. 그의 아들인 제이미 역시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교육 받았기에 자신의 엄마가 아빠에게 뺨을 맞아도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못된 말을 하는 아내에게 폭력을 가함으로 가장 혹은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저 시대에는 ‘당연한’ 가치관이었던 것이다. 제이미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판도라는 충격을 받는다. 나는 저 감정이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거리감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그 사람과 얘기를 하거나, 설득을 하거나, 때려서라도 좁힐 수 없는 거리의 존재를 알게 됐을 때의 감정. ‘맞지 않고,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는 여자.’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그게 실현되고 있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 지위가 저 시대에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녀, 아내, 어머니, 할머니와 같이 여성에게 붙는 수많은 꼬리표가 아니라 그저 ‘나’로 존재하기 위한 판도라의 고민이 어떻게 결실을 맺게 될 지 궁금하다.
 
한편, 판도라가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 당시 시대의 수혜자였던 크리스로부터 비롯된 것임은 아이러니컬하다. 판도라가 남편이 아내에게 행하는 폭력에 의문을 가졌던 것은 자신이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흑인이나 빈곤층에게 수술 방법을 시험했다는 이야기에 의문을 품었던 것은 본인 역시 유색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치관에 따라 본인이 그런 입장에 처해있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들은 많다. 그러나 판도라가 저런 생각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의 영향이 가장 크다. 저 시대에, 저 나이에, 저 성별로서 책을 읽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비관습적이고 반종교적인 아버지 크리스가 책으로 도피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판도라를 교육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당시에 학교는 쓸 데 없는 공부를 가르치는 곳으로 여겨졌으며, 아이, 여성, 유색인 등 온갖 대상에 대한 무지와 차별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이질적인 존재들은 시대의 당연한 가치관들을 거부하며 묻는다.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담론이 활발해지고 있는 요즘, 나는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는 차별과 싸워온 역사였다. 신분, 성별, 피부색 등 여러 기준으로 차별과 혐오를 행해온 당연한 질서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있었다. 현대 역시 명문화된 계급은 없지만 관습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이들을 차별하고, 그 차별을 ‘당연한’ 질서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당연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 당연했나? 기억했으면 좋겠다. 시대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수많은 질서에 대한 의문이 현대 시대의 가치관을 형성해왔다는 것을. 현대에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 역시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귀찮거나 유별난 존재가 아니라 우리보다 앞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음을. 내가 그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한 고민을 치열하게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도 있음을.


[김마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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