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본주의의 잠식된 정의 -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 [시각예술]

글 입력 2017.04.14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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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황야의 7인>을 리메이크한 영화 <매그니피센트7>이 개봉했었다. 최근 개봉하는 영화들 중 서부극을 다룬 영화는 거의 없어 인상깊었던 기억이 있다. 비록 현재 대중적인 장르는 아니지만 1960년에서 70년까지 매우 큰 인기를 얻었던 서부 영화는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그러한 서부 영화의 매력적인 특징을 가져와 현대적으로 변형한 영화이다. 말을 타고 있는 카우보이, 보안관들, 인디언들. 그리고 영화의 배경은 마초의 느낌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텍사스. 공간과 등장인물들로 서부극의 느낌을 주는 반면, 시대적 배경을 자본주의 시대인 현대로 선택함으로써 이중적인 특징을 나란히 삽입해 특이한 모습을 보였다. 현대판 서부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채택한 이 영화는 이런 원초적인 배경 속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보여주고자 했다.


보안관들 헤밀턴이 귀여워.jpg

 
  사실 영화 <로스트인더스트>를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주 단조로운 배치 구조를 지니고 있는 영화이다. 은행 털이범 형제와 이들을 잡고자 하는 보안관들 두 명. 행동파인 형, 머리를 쓰는 동생. 곧 은퇴를 앞둔 백인, 그의 파트너 인디언. 명백한 대립성과 각자 대표적인 성격들을 띄고 있기 때문에 캐릭터 파악에는 어렵지 않다.


movie_image.jpg
 

 하지만 토비와 태너를 그저 평면적인 은행 털이범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들을 그렇게 이해했다면 영화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겠다.


그들은 어머니가 유산으로 남긴 땅마저 뺏길 지경에 놓인
지독한 자본주의의 피해자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은행털이범으로 빚에서 탈출하고자 한 것인가? 눈, 코, 입이 뚫린 검정 복면을 쓰고 총을 무작정 겨누는 은행털이범의 모습은 너무 뻔한 클리셰인데 말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은행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자본주의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한데, 쉽게 설명하자면 자본주의 사회는 ‘빚이 있어야 돌아가는 사회’이다. 빚이 없으면 새로운 돈이 더 이상 창조되지 않고, 돈이 창조되지 않으면 자본주의도 망가지기 때문이다. 빚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은행은 가난의 악순환을 이끄는 주체였으며 은행털이범으로 위장한 형제는 그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었다.





로스트 인 파운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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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있든 파도가 몰아치든(Hell or High water) 목요일까지만 갚으세요.
그럼 다 해결이에요.”


 대출금 상환 만기일을 며칠 앞두고 형제의 회계사가 한 말이다. 아마 토비와 태너에게 지옥과 파도는 ‘범죄’였을 것이다. 교도소에서 나온지 얼마 안된 형과 특정한 직업이 없는 동생. 이 형제에게 범죄 이외에 떠오르는 마땅한 해결책이 있었을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범죄 행위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인물들이 자연스레 관객으로부터 이해심을 이끌어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죄 짓고 멀쩡한 놈 본 적 없어.”


태너도 그들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어떠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지
자신이 알면서도 지옥과 파도에 뛰어든 그들을
나는 함부로 비난할 수 없었다.





황야찡.jpg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가 웰메이드(well-made)라고 인정받을 수 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서부극의 현대화, 인디언과 백인 사이의 농담(나름 민감할 수도 있는 말의 씨들이 숨겨져 있다.), 사회 시스템을 마주하는 개인의 모습. 이러한 세 가지 부분을 놓치지 않고 극 끝까지 이끌어 나갔다는 점에서 굉장한 호평을 받을 만한 영화였다.


토비찡.jpg
 

“난 평생 가난하게 살았어요. 부모님도 그랬고 조부모님들도 그랬고.
가난은 전염병 같아서 대를 이어 전해지면서 사람을 괴롭히죠.
내가 아는 사람을 전부 감염시키고..
하지만 내 자식들은 안돼요.”


 인상깊다. 이 영화의 최고의 대사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들려오는 단어 ‘흙수저’, ‘금수저’. 개인적으로 이런 워딩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감출 수 없다. 개인을 ‘수저’라고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단지 돈 때문에 부모를 ‘흙’이라고 칭하는 것은 이 사회가 얼마나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는지 알게 해주는 요소이다. 토비는 자신의 자식들이 이런 놀림을 받지 않도록 발버둥친 것이었다. 어떤 부모가 그것을 원할까.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난 속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자본주의의 중심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모순적인 시스템.
우리는 정의가 자본주의에 잠식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맹주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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