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계산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

문학과 사회 17년 봄, 권여선
글 입력 2017.04.09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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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사회에서 '빈곤'이라는 어휘는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와는 다른 류에서 사용된다. 이를 테면 치즈김밥을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그냥 김밥을 먹는 수준. 그도 아니라면 감정적, 정신적 빈곤으로 이해된다. 이 어휘의 사용 범위가 전이된 것은 우리 사회가 보릿고개를 지나왔다고 말하고 있고, 이는 기쁜 일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 눈에는 절대 빈곤자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마당에 우리는 절대 빈곤을 말해야만 할까?


  소희는 엄마와 언니에게 버림받은 스무 살 초반의 사회초년생이다. 소희라는 이름 앞에 붙은 빚은 까마득하고, 소희의 월급은 그를 갚아나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저금 해야만 한다. '저금은 소희의 목숨줄'이니까, 원금을 빨리 갚지 않으면 소희는 5년 동안 저축 은행의 독촉에 시달린다. 소희는 계산기를 자주 두들기고, '돈 계산을 하고 가계부를 쓸 때에만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자신이 언제 이 생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까지를 계산할 수는 없다.

  이 이상으로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을까 싶다. 절대적 빈곤 상태에 처해 있는 주인공은 정말로 죽을 것처럼 보이고, 그런 소희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독자는 숨이 탁탁 막힌다. 소희의 손톱은 가벼운 상처처럼 그려지다가 얼어죽을 냉동 치료를 요하는 상처가 되는데, 소설을 다 읽을 즈음이면 꼭 소희라는 인물은 우리 손톱에 남은 상처로 느껴진다. 이 이야기가 우리를 불편하고 괴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종의 충격을 안긴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절대 빈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가.


 '먹고사니즘'의 문제는 사실 다양한 서사 속에서 오래도록 논의되어 왔다. 비단 한국 사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이야기들든 먹고 삶의 문제에서 출발하고는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빈곤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빈곤자의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가난 포르노'에 매몰되어 있다. 이 환상에 자유롭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상화도 공공연하게 이뤄진다. 게다가 최근의 절대 빈곤은 그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각종 유기와 무관심 속에 자행되는 어떤 행위로 발현되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 빈곤의 층위는 훨씬 복잡해질 여지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 가령 소희 같은 인물이 그렇다. 우리는 빈곤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난함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층위로 그려지는 사회다. 먹고 산다는 문제는 어쩌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문제처럼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절대 빈곤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한다. 이 또한 다양한 층위로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절대 빈곤에 대해서 얘기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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