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소소한 단상] 틀을 깨다, 창조하다, 배우다

글 입력 2017.04.10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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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을 깨다, 창조하다, 배우다
<날개.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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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

재수 생활을 마치고, 스무 살의 나는 대학 박람회를 방문했다. 한 대학 부스에 걸려 있는 글귀를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창의적 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라는 말이 참 거슬렸다. ‘창의’라니. 이미 나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그리고 지난 1년까지 ‘창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교육제도 안에서 커왔는걸? 괴로운 취준 생활 속에서 나는 더 자주 이 단어와 마주했다. “창의적 인재”를 기다린다는 둥, “대학시절 경험한 창의적 활동”에 대해 글을 쓰라는 둥.. 평범한 대학 생활을 보냈다고 생각한 나로써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전을 찾았다. 창의란 ‘새로운 의견을 생각하여 낸다’는 의미라고 한다. 더 헷갈렸다.

도대체 ‘창의’가 뭔데?

 
 
◎ 틀을 깨다, ‘안상수체’로부터

 
서울시립미술관의 <날개. 파티> 전시를 보던 중 ‘안상수체’에 관한 글을 읽고, 잠시 잊고 지냈던 ‘창의’라는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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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는 ‘안상수체’를 발표했다. 지금 우리에겐 무척이나 익숙한 글꼴이다. 당시 안상수체가 가지는 의미가 특별했던 이유는 바로 탈네모틀의 글꼴이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한글은 갑자기 찾아온 근대가 규정한 네모 틀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었다. 한자나 영문과는 그 원리와 형태가 달랐음에도 말이다. ‘안상수체’는 한글을 네모 틀의 질서 속에서 해방시키고, 오랫동안 한자의 그늘에 가려 있던 한글을 현대적으로 탈바꿈시킨 첫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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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을 깨는 것. 창의란 이런 것이 아닐까? 안상수는 틀을 깼고, 안상수의 정체성은 바로 이 ‘안상수체’로부터 시작했다.

 
 
◎ 창조하다, 날개


안상수체를 시작으로 그간 안상수는 글꼴 디자인, 타이포그라피, 편집 디자인, 로고 타입 디자인, 포스터 제작, 벽면 드로잉과 설치 작업, 문자 퍼포먼스, 캔버스 문자도, 실크 스크린, 도자기 타일 등 다양한 형식 실험으로 ‘한글’을 작업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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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을 깬 날개(디자이너 안상수의 호와 PaTI 교장을 뜻하는 이름씨)는 세계에서 가장 어린 문자인‘한글’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조형 언어와 디자인 작법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소통을 위한 기호이자 정보 전달 매체인 ‘문자’가 가진 속성을 해체하고, 문자의 조형성을 표현의 주체로 두어 각종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 이미지는 명료한 기호가 되기도 하고, 불분명한 어떤 그림이 되기도 하면서 안상수의 추상적 놀이의 세계를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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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가 다루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항상 새로운 ‘무엇’이 되며 발전했다.

 

◎ 배우다, 파티


안상수의 ‘문자’를 중심으로 한 여러가지 창의적인 ‘행동’은 파티(PaTI)로 이어졌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의 줄임 이름인 '파티’는 가장 우리다운 교육을 찾아 실험하고 실천하는 디자인 공동체이자 교육 협동조합이다. <날개. 파티> 전시의 두 번째 부분인 '파티'에서는 PaTI가 2012년 2명의 학생과 함께 시작한 예비학교를 거쳐 올해 14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기까지 축적해온 종합적인 성과와 기록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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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의 작품 세계 근간에 ‘한글’이 있다면,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는 ‘문자’와 ‘한글의 창조적 정신’을 중심에 두고 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교육’이 무엇일까? 내가 대학 박람회에서 보았던 “창의적 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과연 ‘틀을 깨는 배움’의 기회를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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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의 배우미(‘학생’을 뜻하는 PaTI 용어)들은 ‘배움’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배움이란 ‘학습의 개별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동되고, 삶의 근저에 두 발을 디딘 상태에서 실용적인 쓰임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가치를 공유하고, 더 나아가 개인의 삶을 디자인하는 독립된 주체를 향한 여정’이라고. 언뜻 보면 어려운 말인 것 같지만, 나는 쉽게 이해했다. 즉, 자기 스스로의 삶을 디자인하고 자연스럽게 다른 이의 삶과 조화를 이룬다는 뜻일 것이다. 어떤 특정 제도와 법칙에 얽매이지 않은 파티의 배우미들은 다양한 프로젝트와 실험을 통해 틀을 깨고, 창조하고, 배우는 과정을 반복한다. 안상수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들의 배움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하나의 배움이 다른 배움과 만나며 삶을 디자인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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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안에서 ‘창의적 인재’가 탄생하기를 원한다. 그 틀을 깨고 날아오를 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날개. 파티> 전시는 ‘문자’가 근간이 되는 안상수의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보다도 현대사회에서 재고해야 할 교육의 방향성을 알 수 있는 전시가 아닐까 싶다.
틀을 깰 그 날을 위하여!


[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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