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유산진흥원] 항일독립정신이 서려있는 서대문 일원 (1)

글 입력 2017.04.08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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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전 3월

국권회복을 위해 민족자존의 가치를 드높인
순국선열의 고귀한 희생을 함께
되새겨 보는 시간입니다.

항일독립 정신이 서려있는 서대문 일대,
지나간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해설과 함께 역사문화 유적지
주변을 깨끗이 청소합니다.

이동경로
서대문역 3번 출발 → 돈의문 터 → 경교장 →
홍난파 가옥 → 딜쿠샤 → 서울 성곽 → 사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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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위치.
조선시대 서울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서대문’이라고도 합니다. 태조 5년, 1396년 세워졌다가 1413년 폐쇄되었고 다시 세종 때 수리하여 돈의문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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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년 헐린 돈의문 사진엽서 -


조선시대 서울의 서북쪽의 관문으로 사용되었던 우리의 중요한 사적인 돈의문은 안타깝게도 일제에 의해 도로 확장이라는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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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의 대략적인 모습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집의 초루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습니다.



경교장

서울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에 위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의 사저로, 신탁통치 반대 등 현대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곳입니다. 1939년에 지하1층, 지상2층의 규모로 지어진 건물로 1930년대의 건축술을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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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2층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다우며, 1층의 좌우창을 원형으로 돌출시켰고 중앙 2층에 있는 아치창은 이국적인 느낌을 줍니다. 8·15 광복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는데 원래 이름인 죽첨장 대신 근처에 있던 경구교라는 다리의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고 하네요. 김구 선생님이 반탁, 건국 통일 운동을 하셨을 때 흔히‘서대문 경교장’이라고 일컬었으며, 민족진영의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되었어요.

또한 김구 선생님이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흉탄에 시해된 곳이고 국민장을 치렀던 곳입니다. 이후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타이완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에는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하여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어왔다가 이후 서울시에서 소유는 그대로 두되 전체 공간을 복원하기로 합의해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하여 2013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습니다.



백범 김구 (1876~1949)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지휘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지내셨습니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합니다. 그 당시 임시정부의 대통령은 이승만 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우리나라의 해방수단으로 외교를 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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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승만이 미국에게 대리통치를 요구하거나 연통제와 교통국이 무너지는 등 임시정부의 무능으로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나가서 결국 김구가 임시정부의 이름만 유지하게 됩니다. 이를 지켜보던 김구는 임시정부 활동에 활기를 넣고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합니다.

한인 애국단의 대표적 일원으로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있는데 이들의 거사로 중국 국민당의 지원이 시작됩니다. 김구는 한국독립당이라는 군대를 만들어 국내진공작전을 위해 미국의 OSS와 연합하는 등 노력을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그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갑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는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의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 하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습니다. 안두희에게는 배후가 있었다고 사람들이 추측하나 아직까진 밝혀진 것은 없다고 합니다.



홍난파 가옥

홍난파 (1898~1941)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되었던 가곡 '봉선화', '고향의 봄'의 작곡자며, 이밖에 다양한 문예활동을 통하여 일제강점기의 한국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일제에 타협했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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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는 경기도 지금의 화성시 활초동에서 출생하여 5세 때 상경, 14세 에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교사로 있다가 1917년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음악, 문학, 미술 등 세 가지 분야에 걸쳐 잡지 발간 등의 문예활동에 주력했다고 합니다. 귀국한 뒤에는 <대한매일신보> 등의 기자로 활동도 하였고 대표곡 '봉선화'가 수록된 창작곡집 [처녀혼]을 출간하였습니다. 1926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 하였습니다.

그는 다수의 작곡을 하였는데, 그의 작곡 경향이 한국 선율의 요소를 반영시켜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으로 그가 1930년대 이후 한국음악 창작의 패턴을 정립시킨 주요 작곡가로 평가되는 이유입니다. 1931년 바이올린 수업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본격적인 독주회를 가지고 귀국합니다.

그 후 연주활동과 경성보육학교, 이화여자 전문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36년 경성방송 현악단 지휘자, 빅터레코드의 양악부장을 역임했고, 난파트리오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평론집 <음악만필> 등을 통하여 음악문화의 계몽발전에 기여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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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영국인 선교사가 지음, 홍난파 가옥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 및 신동아질서 건설에 협조하였습니다. 또한 친일 성향의 글과 작품을 다수 발표하였지요. 현재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한사람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임지원 엮음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소공재 소개

'소통, 공감, 재미'의 머리글자를 딴 '소공재'는 우리 문화유산을 통해 소통하며 공감을 나눔으로써 재미를 추구하는 사단법인 한국문화유산진흥원의 산하 봉사단체입니다.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애호사항을 고취하고 회원 간의 친목과 이해를 증진시키며 문화유산 진흥을 위한 봉사활동을 통해 공익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ARTINSIGHT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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