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혐오하는 우리 [문화 전반]

혐오하는 대상이 있습니까?
글 입력 2017.04.0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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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하는 우리


혐오하는 대상이 있냐는 질문에 쉽게 그 대상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혐오와 우리 사회가 멀어서도, 또는 ‘혐오 한다’는 말의 감정적 무게 때문도 아니다. 사회 전반에 넓게 깔린 혐오는 인식되지 않는 형태로, 즉 거치적거리지 않는 최적의 형태로 진화하여 은밀하게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전에는 여성에 대한 혐오가 이 사회 전반에 걸쳐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또한 혐오의 기본 성질을 배척이라고 한다면, 배척되어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을 재인식하는 과정만큼이나 혐오를 인식하는 과정은 까다로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를 없애자는 운동의 과정에는 혐오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 즉 자신도 무언가를 혐오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누군가는 열심히 예민해하고 불편해하며 당신이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프로 불편러’ 따위의 말을 들어가면서도 불편함을 드러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바로 혐오의 기본적이며 찌질한 속성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의 불편하다는 발언을 되려 불편해한다.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 즉 단순히 무시하거나, 혐오를 혐오로 맞대응하는 대신 굳이 에너지를 들여가며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은 부딪히는 것이고, 분노하는 것이지만, 이는 그저 ‘예민하다’, ‘까칠하다’라는 말로 대체된다. 분명히 불편한 행동을 한 사람을 보편으로 간주하고 불편함을 느낀 사람을 별종으로 몰아세운다. 이런 사회의 기형적인 반응은 별종이 되고 싶지 않은 우리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폭력으로, 두려움마저 느끼게 한다. 불편하다고 아무리 말해봐야 그건 분노가 아니라 예민하고 까칠한 누군가의 뾰루퉁한 투정 정도가 된다. 상대의 불편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는 불편한 언사를 하는 사람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으로도 불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를 일반화 하지 말라며,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며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하려 하고 자신의 무죄를, 나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려 한다. 혹여나 자신이 가해자의 신분이 될까 두려운 우리는 기어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꾸며 피해자의 억울함을 연기한다. 억울하지 못해서 더 억울한 우리는 잘못이 없는 사람도 잘못한 사람으로 낙인찍기에 이른다.

 
당신이 나를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데, 내가 아무리 나를 혐오하지 말라고 한들 당신에게 나의 분노는 얼마나 납득 불가능한 것일까.
 

혐오의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자연히 따라오는 것은 체념, 혹은 포기다. 이 고질적인 폭력의 순환 고리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사는 게 차라리 낫겠다, 저 사람과는 다신 대화하지 말아야지, 그냥 무시해버려야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 오른다. 설명이 안 되는 걸까. 정말이지 납득 불가능한 것일까. 이 사회에서 누가 누구더러 분노하라는, 설명하라는, 납득시키라는 책임을 부과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무력해보여도 무의미하지는 않은, 그런 일들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계속하여 불편하다 말할 것이며, 잘못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900일이 되던 날 유가족분들 중 한 분이 말했다.


“900일 되도록 아무 것도 변한 건 없어 보이고, 그래서 무력감을 느끼죠? 하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우리는 900일의 시간만큼 진실과 가까워졌습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거처럼 보이고, 사람들은 무뎌지는 거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의 목소리, 분노는 그 만큼의 공간을 확장시켰고, 그 만큼의 무게를 졌고, 그 만큼의 의미를 가졌다. 무의미하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고, 그래서 체념할 수도 없다. 나에게는 그 의미를 묵살시킬 어떤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혐오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어떤 모습으로 막을 내릴지 감조차 잡을 수 없도록 만연하다. 이 상황이 나아지고 있음을 실감하기는 기대할 수 없고, 나는 계속하여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이 세상을 돌이킬 수 없는 지옥이라고 할 수 없다. 혐오에 맞서는 우리는 이 상황을, 이 현실을 함부로 규정지을 수 없다. 규정지어선 안 된다.


[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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