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피티. 탄생 초기 때부터 다분히 정치적인 예술장르다. 부술 수 없을 것 같은 높은 담벼락과 장벽들을 마치 우습게 만들겠다는 듯이 색색의 스프레이와 페인트로 즉흥적인 그림들을 새겨 놓고 조롱한다. 인종주의, 환경파괴, 정치/사회적 타락, 성차별 문제 등등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가장 후미진, 혹은 누구나 볼 있는 골목과 대로변 구석에서 눈에 띄는 모습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힙합 문화에서 파생된 맥락이 있지만 현대 그라피티는 이제 보다 독립적인 분야가 된 것 같다. 주제의식도 다양해졌다.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행위를 넘어 심미적 아름다움까지 성취해 가고 있고 다분히 실험적이다. 얼마 전 SNS에서 큰 호응을 받으며 뜬 심찬양 씨의 ‘한복을 입은 흑인 여성 그라피티’를 떠올리면 그라피티가 이제 단순 구호나 낙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는 지난달 3월 15일부터 “위대한 낙서 <셰퍼드 페어리(OBEY GIANT) 전 : 평화와 정의>”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그라피티 아티스트라고하면 키스 헤링 정도 밖에 이름을 대지 못할 정도로 관심이 부족했고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그런 나도 충분히 관람할 만한 전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트인사이트로부터 문화초청이 왔을 때 고민 없이 바로 신청했다. 일단 거리와 골목의 예술인 그라피티를 미술관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들여와 관람객들에게 공개된다는 것이 흥미로웠고 둘째로, 대중에게 열린 장르인 만큼 그 분야에 대한 깊은 조예가 없다 하더라도 메시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세 번째로 그냥 한가람 미술관에 오랜만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강력한 동기였다. 

  이번 전시에 관해 예술의 전당은 현대 그라피티 예술의 미(美)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 정치, 사회, 환경을 관통하는 철학의 깊은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셰퍼드 페어리의 290여점의 작품들은 사진에서부터 일러스트, 페인팅, 스텐실, 실크스크린을 활용하여 다양한 감각들을 동원해 의미를 표현하기에 아마 볼거리도 많고 다채롭게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OBEY GIANT라는 캠페인에 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대한 가장 현대적인 물음을 제시했던 프로젝트라고 하는데 Obey라는 스트릿브랜드가 그것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꽤나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