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꽃 Blue Flower - 김택상 최승윤 허유진

글 입력 2017.03.2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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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꽃 BLUE FLOWER
-김택상 최승윤 허유진-
 
2017. 4. 7(금) – 5. 28(일)
갤러리JJ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 745 앙드레김 빌딩)
화-금 11am-7pm, 주말 12-6pm (월요일 휴관)
OPENING RECEPTION : 4. 7(금) 5PM
* 부대행사: 아티스트 토크_ 4. 29(토) 2PM
 
 

“그는 이제 막 미지의 땅의 푸른 물결에 몸을 담그려 하고 있었다.
푸른 꽃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 『푸른 꽃』 (1802) 노발리스 -
 

예로부터 푸른색은 하늘의 색, 무한대의 의미로 종종 정신적인 것과 연관되는 등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수많은 이야기와 문화적 함의를 지니며 예술작품에서 각기 다른 상징적 의미를 담아 왔다. 갤러리JJ에서는 다양한 조형 의식으로 작품에서 발현되는 ‘블루Blue’를 중심으로 동시대적 예술 어휘를 조망하는 전시를 마련한다. 이번 전시는 블루에 관한 거시 담론이기보다, 초대된 3인의 작가들 각자가 사유해온 세계를 ‘블루’라는 공동의 단서를 통해 열어보고 또한 재해석해보는 자리로 의미될 것이다. 더불어 색채의 공명을 통한 아름다움과 함께 현상 너머를 바라보고 감각하는 장이 되고자 한다.
 
전시의 제목 <푸른 꽃>은 17세기말 독일 낭만주의 문학가인 노발리스Novalis의 소설 제목에서 가져왔다. 여기서 ‘푸른 꽃’이란 낭만적 그리움인 동시에 스스로의 마음과 정서를 통한 세계 인식의 상징이다.

유럽에서 한때 우울과 가난, 혹은 부정적 의미로 쓰였던 푸른색은 중세를 지나면서 교회나 미술작품에서 성모 마리아의 옷이 푸른색으로 표현되거나 천상을 의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권력과 높은 지위,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고귀한 색이었음은 당시의 수많은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푸른색은 <색채론>을 쓰기도 했던 괴테의 작품 속 베르테르의 푸른색 의상과 함께 우수와 감수성, 이상적인 존재의 의미를 담아 당대의 인기를 누리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색이 되기도 했다.

고결한 사상을 담아내는데 사용했던 당시의 블루는 사실 재료 면에서도 어떤 색보다도 구하기 힘든 고가의 안료였다. 중세에 푸른색인 울트라마린은 청금석에서 추출한 만큼 보석의 가치와 맞먹었고 뒤이은 코발트블루 또한 천연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한 색이었다. 오늘날 안료의 기술적 진보와 다양해진 매체로 인해 그 표현과 의미가 확장되고 풍부해졌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가까이 현대미술에서 블루는 가장 추상적 색채로서 시대와 맥락을 함께 해왔다. 블루는 칸딘스키에게는 무한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정신적 매개였고 이브 클라인에게는 어떠한 재현적인 것과도 관계없이 가장 순수하고 비물질적인 공간을 드러내기 좋은 색이었으며, 한편 김환기에게는 그리움의 정서로 접근되기도 하였다.

독일의 현대미술가 고트하르트 그라우프너는 “색의 미묘한 차이가 모든 것을 바꾼다.”고 하였다. 다양한 블루의 스펙트럼을 보여줄 이번 전시에서 푸른색은 김택상에게는 자연의 빛이며, 허유진은 대리 자아의 표상으로, 그리고 최승윤에게는 세상의 근본 색이자 양면성의 색채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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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상 Breathing light-red in blue,water acrylic epoxy on canvas,60x50cm,2016
 

김택상의 작품 중 <푸른 바람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푸르스름하고 부드러운 화면에는 농담이 다른 곱고 푸른 색조의 층들이 미묘한 차이로 섬세하게 겹쳐져 있다. 분명 캔버스라는 2차원의 지지대를 감안하더라도 안으로 자꾸만 이어지는 투명한 공간들은 물질성이 사라진 듯 부유하는 어른거림으로 가득 차 있어 감각적이고 명상적인 회화를 구현한다. 명확히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는 수많은 푸른 빛의 결이다.

작가는 ‘블루는 ‘淡(맑을 담)’이라고 느낀다. 사실 푸른색은 그의 작업의 시초를 이룬다. ‘숨 빛 Breath Hue’으로 일컫는 김택상의 작업은 맑고 깊은 ‘물 빛’에서 비롯된다. 어릴 적 개울가의 조약돌, 혹은 맑은 물 빛을 만나 마음으로 매료되던 그 순간들은 불현듯 드러나는 세계와의 마주침이었고, 말할 수 없으나 느낄 수 있는, 충만한 아름다움에 관한 탐구의 시작이었다.

현대 철학자 들뢰즈에 의하면, 빛은 시간이고 색은 공간이다. 색으로써 자연이 빚어낸 빛의 질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작가는 작업에 시간이라는 요소를 가져온다. 틀에 눕혀진 캔버스(물이 스밀 수 있는 천) 위로 아주 약간의 안료를 탄 말간 물을 부어 둔 상태로 며칠간 안료의 침전을 기다린 후 꺼내서 걸어두고 말리는데, 자연스럽게 물과 안료가 캔버스 천에 스며들기를 기다리는 이 과정은 수십 번 반복된다. 이러한 작업 태도는 수행이자 명상의 시간으로, 우연의 요소를 더하는 순간마다의 분위기는 곧 작품의 내용이 된다.

반복은 차이를 만든다. 결국 작업실에서의 환경 즉 빛과 바람, 중력, 공기라는 자연의 요소가 시간 차를 두고서 고스란히 화폭에 담기면서 얇은 층들,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과 틈들이 만들어진다. 캔버스 천 위에 안료가 얹혀진 것이 아닌, 천과 안료가 하나가 되어 투과됨으로써 생기는 이러한 사이 공간들로 인해, 통과하는 빛이 굴절하면서 내부로부터 율동과 운동감이 형성된다. 통상적인 물체의 표면 색이 아닌, 색 이전의 살아 숨쉬는 빛 자체가 회화 내부에서 번져 나오는 것을 느끼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예술적 성취는 이미 국내외적으로 탄탄하게 인정받고 있다.

“숨 쉬는 듯 생기를 머금은 빛깔”을 향한 그의 작업 매체는 결국 살아있는 자연, 그리고 그 자연과 조우하는 인간이다. 생명력이 깃든 아름다움. 김택상 작품에서 우리가 감각하는 빛깔은 근원적으로 비물질적이며, 시간의 흔적이자 푸른 바람과 머물던 빛, 물 빛의 맑고 깊은 환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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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유진, Bottle, oil on canvas, 116.8x80.3cm, 2017
 

클로즈업된 유리병이 있는 허유진의 화면은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긴장감이 있다. 여기에는 허유진만의 노련한 색감이 크게 작용하건대, 유리의 투명하고 반짝이는 섬광과 동시에 깊고 푸른 심연에의 침잠이 함께 오묘한 빛으로 어우러지면서 무척 화려하고 연극적인 느낌이 연출된다. 전체가 화려한 어둠인 동시에 명멸하는 빛처럼 보인다. 인간의 감각이 지닌 경험적 관점에서 색채를 사고했던 괴테는 순수한 색채란 빛과 어둠을 뜻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색채는 빛과 어둠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푸른색은 빛에 의하여 약하게 변한 어둠이다. 허유진 작품의 배경은 주로 푸른색 계열이 많다. 유리병은 그 속성 상 빛을 반사하고 투영하여 자신은 물론 주변과 서로 빛을 주고 받게 되어 미묘하게 병을 둘러싼 분위기의 변화를 야기시킨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빛, 그리고 그 빛으로 인해 하릴없이 속살을 내보이는 푸른 어두움일 수도 있다.

‘병(Bottle)’ 이미지로 잘 알려진 허유진은 오랜 기간 동안 집요하게 유리병 고유의 물성과 색채 표현을 통한 회화적 실험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세계를 구축했다. 긴장감 있는 구도와 확대된 대상, 전체보다 부분을 드러내어 구상적 형태가 아닌 배경의 빛의 스펙트럼과의 분리되지 않는 조화로움에 집중한 것으로 보아, 그의 작품은 추상의 경계지점에서 전통적 정물화와 극사실적 회화의 범주를 넘어선다.

여기서 대상은 현실과 인간에 관한 상징적인 기호로 작동한다. 작가는 현대사회의 흔한 일상용품인 병의 물성을 통하여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을, 그리고 낯선 모습이지만 또한 익숙한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고 이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화면의 짙푸른 청록 빛은 존재감을 가지고 색 자체로 침잠하며 낮게 드리우면서, 화려함과 카리스마라는 이중성으로 작가의 대리자아를 완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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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윤, 정지의 시작-2015-22_oil on canvas_70x120cm_2015
 
 
최승윤의 작품은 시원한 붓 터치들이 파란 획을 그으며 마치 유기체 같이 살아 움직이는 듯, 서로 만나고 겹치면서 긴장감 있고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어낸다. 그는 색이 주는 감각과 붓 터치의 움직임으로써 보이지 않는 세상의 본질을 화면 위에 표현한다. 주로 푸른 단색의 작품이 많은데, 그에 의하면, 푸른색은 근본적인 동시에 양면성을 가진 색채로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패러독스’, ‘균형’의 개념과 가장 잘 맞는 색이다. 즉, 푸른색은 하늘과 물, 지구라는 근본적인 것들의 색상이며, 희망과 우울함이라는 양면적 정서를 담고 있고, 차가운 한편 뜨거운 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직접 만든 도구로 일필휘지 그려나가면서 회화적 움직임과 정지의 순간,공존하지 못할 것 같은 것들의 느낌을 동시에 담으려 한다. 그가 생각하는 세상의 기본은 반대의 역설로 이루어져 있다. 우주 혹은 지구 생명의 시작, 음과 양에서부터 그림 그리기의 시작과 끝, 거꾸로만 가는 다이어트의 결말 등 우리 주변의 사소한 것들까지 사고하며 반대되는 것들의 균형을 생각하고 반대의 공존으로 세상을 읽어나간다.

화면에서 움직이는 듯 정지하고, 자유로운 듯 통제된 선과 공간들은 서로 충돌하고 또 화합하면서 유연하게 운동하고 생명력으로 진화한다. <정지의 시작>, <출발의 완성>, <시간의 단면> 등의 작품 제목으로 보아, 시작과 끝은 맞닿아 있고 곧 그것들은 분리되지 않은 전체이며 ‘하나’로 귀결된다.

여기서 시간과 운동이 흐름이라는 본질로 파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현대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에 의하면, 지속하는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끊임없는 변화만 있을 뿐 시작과 끝은 맞닿아 있다. “지속은 순수 변화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자 운동의 길이다.” 따라서 지속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전체성을 내포한다. 생명의 의식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연속적인 흐름으로 나타난다. 최승윤의 회화는 새로운 질적 차이를 창조해내는 생성의 운동,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움직이는 생명체의 표출에 다름 아니다.

 
한편, 본 전시에서는 유려한 색채와 특유의 문양을 담은 디자인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의상디자이너로 자리매김한 ‘앙드레김아틀리에’에서 특별히 제작한 아름다운 푸른 의상들을 함께 전시하여, 더욱 풍부한 ‘블루’의 향연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글 강주연 │ GalleryJJ Director
 

[강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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