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떤 취미발레생의 넋두리_1 [예술철학]

발레와의 강렬하고 아쉬웠던 첫 만남, 그리고 다시 불타오른 두 번째 만남
글 입력 2017.03.25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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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여자들이 그렇듯, 나는 유치원 때 처음으로 발레를 접했다.

 어렸을 때부터 바른 자세를 만들기 위해 부모님이 딸을 발레학원에 보내는 흔한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의 경우 또 다른 동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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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5-6살 때였던 것 같다. '지젤' 공연을 본 뒤에 내가 발레에 관심을 보이자, 엄마는 지인으로부터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인형’을 녹화한 비디오를 얻어다 주셨다.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내가 그 비디오를 틀어놓고는 화면 속 발레리나들과 함께 거실을 누비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것도 4시간을 한번도 쉬지 않고 말이다. 그 때 내 모습을 녹화해 놓은 비디오 테이프가 아직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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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아이가 어정쩡하게 발레리나 흉내를 내는 모양새를 춤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이런 내 모습을 보신 엄마는 나를 집에서 꽤 떨어져 있는 백화점 문화센터의 어린이발레교실에 보내셨다.

 하지만 왜였을까? 한없이 즐거울 줄로만 알았지만, 선천적으로 소심하고 새로운 환경을 두려워했던 나에게는 아마 나만한 또래친구들 앞에서 이런저런 동작을 하는 게 어딘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발레수업을 생각보다는 많이 즐기지 못하고 그냥저냥 다니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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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난 줄로만 알았던 발레와의 인연은, 신기하게도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태권도 등등 여러 운동을 해 보았었지만 어느 것에도 특별히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다 중학교 입학식이 있던 날, 엄마는 동생이 다니는 발레학원에 너도 다녀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이번에도 엄마의 권유였다. 사실 처음에는 중학생이 뜬금없이 무슨 발레를 하나, 어린 애들 사이에서 혼자 튀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다시 발레에 입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다행히도 친구 한 명과 함께 등록해서 창피함은 덜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발레를 시작했다.

 분홍색이나 파스텔 계열의 연습복을 입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혼자 까만색 레오타드를 입고 어정쩡하게 동작을 따라하는 내 모습이 처음엔 어색했고, 발레리나처럼 특별히 날씬하지도 않은 내 모습을 전신거울을 통해 보는 것도 이상했지만 점차 적응되었다.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원이라고 해서 수업이 너무 쉽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내가 이 때 접한 발레는 어렸을 때 잠깐 했던 발레와는 많이 달랐다. 유치원 때 했던 발레는 사실 발레라고 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수준이었다면, 이 시기에는 그 때에 비해 굉장히 강도 높은 수업을 받았다. 겉보기에는 아주 가볍고 쉬워 보였던 동작들이 사실은 굉장한 유연성과 근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운동한다는 차원에서 봐도 시작하길 참 잘한 듯 했다. 수업이 끝나면 몸은 지쳤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단순히 운동효과를 위한 것에서 더 나아가, 나는 발레의 움직임 하나하나에까지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냥 ‘예쁘다, 우아하다’ 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그 아름다운 움직임을 좋아하다 못해 동경했다. 그리고 나도 내 몸으로 그런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어렸을 때 이후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발레에 대한 열정이 다시 뜨겁게 솟아오른 것이다.


 정말 잘하고 싶었다.

 집에서도 쉴 새 없이 스트레칭을 했고, 수많은 영상을 보면서 내가 수석무용수라도 된 것 마냥 따라하기도 했다. 각자 다른 느낌으로 같은 바리에이션을 추는 수많은 발레리나들의 영상을 계속 보면서 감탄했고, 워낙 계속해서 보다 보니 머릿속으로 안무를 다 외워버렸다. 대체 얼마나 오래 발레를 배우면 저렇게 아름답고 우아할 수 있을까, 내가 저 경지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까 하며 거의 하루의 반 이상을 발레만 생각하며 지냈던 것 같다.

 외출할 때 클래식 발레 음악을 들으며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춤추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버릇도 이 때 생겼다. 안무도 다 외웠겠다,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만은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어 우아하고 자유롭게 춤추었다. 24살이 된 지금까지도 계속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이제는 내가 발레를 정말 좋아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습관의 하나로 굳어져 버려서 자동반사적으로 그러는 건지조차 헷갈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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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열심히 신었던 그리쉬코 마야 소프트.
오래되어서 못 신게 된 지금은 책상 장식용 소품이 되었다.


 포인트 슈즈도 신어볼 수 있었다.

 원래 포인트 슈즈는 발레전공자들이 어렸을 때부터 테크닉을 키우다가 적절한 시기가 되었을 때 처음 신는 게 원칙이지만, 나처럼 뒤늦게 취미로 배우는 입장에서는 어차피 테크닉을 완벽하게 다지기에는 늦었으니, 부상당할 위험이 없을 정도로만 적당히 발목 힘이 생기면 신을 수 있도록 해 준 것 같다. 포인트 슈즈를 처음 산 날엔 너무 행복해서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다. 그 며칠간은 집에서도 그걸 신고 돌아다녔다.

 그렇게 초급반에서 시작했던 나는, 2년간 발레를 다시 배우면서 중급반, 고급반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작은 무대에 설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문적인 수준까지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보석이 박힌 하늘색 튜튜 (둥근 접시처럼 옆으로 뻗어있는 스커트가 달린 의상) 를 입고 무대 구석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기하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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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레전공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4-5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해 온 수많은 전공생들과 경쟁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시기였고, 돈도 굉장히 많이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생각을 접었다. 또 나는 그때까지 내 진로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없었고 어떤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나에게 선택지는 많을 것이고, 앞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다보면 언젠간 발레처럼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뛰는 일' 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발레를 또 다시 놓게 되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레는 나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지만,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에 중요한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박한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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